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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안싸가지 룸메이트 세 놈

파격적으로 예의 바른 프랑스 총각들, 처음 봄

by 박민우
IMG_4705.JPG 돌로레스 공원에서 좋답니다.


잘 생긴 프랑스 청년 셋이 들이닥쳤을 때, 나의 평온한 숙면은 날아갔다.

“헤에이. 안녕. 어디서 왔어? 프랑스에서 왔어? 내 이름은 미누야. 한국에서 왔어. 알지? 고양이 미뉴. 미누, 미누, 미뉴우우!”


침대에서 벌떡 일어선 나는 똑 부러지게 아양을 떨었다. 입을 오리처럼 내밀고 미뉴에트 4분의 3박자를 살려서 미뉴, 미뉴, 미뉴우 했다. 뭔가 재수 없지만 사랑스럽지? 이게 동양의 신비야. 세 놈이 아주 정신을 못 차리는구만. 저, 낯가려요. 소심해요. 이러면 다들 ‘박민우, 네가?’ 한다. 억울하다. 진짜 낯가리는 사람은, 낯도 함부로 가리지 못하게 된다. 어색함은 내 죄가 되고 마니까. ‘평균인’이 되려고, 발악하는 것이다. 셋은 대학교 동창이고, 놀랍게도 같은 직장을 다닌다. 휴가도 함께 왔다. 파리 드골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이제 막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캠핑을 하고, 그랜드 캐니언까지 차를 렌트해 달릴 거라고 했다.

“쉿, 샤워는 나가서 해.”


나는 이 말에 충격을 받고 만다. 예의가 바른 프랑스인들이라니. 프랑스가 어떤 나란데. 이스라엘과 함께 싸가지 양대 강국 아닌가? 국민 개개인이 균등하게 싸가지가 없다. 그래서 싫다? 아니, 그래서 좋다. 싸가지란 자극적인 단어를 썼지만, 가식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틱틱거리며 말하는 게 거슬리면 틱틱 맞받아치면 된다. 의외로 담백하게 받아들인다. 너 말투 거슬려. 이렇게 말하면, 몰랐어, 고칠게. 이런 식이다. 말 빙빙 돌려할 필요가 없다. 속이 다 뻥 뚫린다. 빠르게 친해진다. 나는 국적 때문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가지지는 않는다. 나를 싫어하면, 그냥 그 인간들이 싫다. 이란이 내게 개막장 사막 국가가 된 이유는, 버스에서 이란 고등학생들이 너, 못생겼어. 얼레리, 꼴레리. 했기 때문이다.

조심조심! 문을 열고 세 친구가 살금살금 기어들어왔다. 잠귀가 밝은 나는 그 과정을 낱낱이 목격했다. 슈퍼 두퍼 햄버거가 들어간 아랫배를 기분 좋게 문지르는 중이었다. 뉴욕에 세이크쉑 버거가 있다면, 샌프란시스코엔 슈퍼두퍼가 있다. 세이크쉑 버거에 큰 재미를 못 본 나는 슈퍼 두퍼에 묘하게 비호감이었다. 이름에서 왕꿈틀이나 새콤 달콤 냄새가 났다. 초딩용 불량식품류의 작명이다. 유명하다니까 먹겠지만, 세이크쉑보다 나을 것 같지 않았다. 마지못해 한 번 가주었더니, 세이크쉑보다 두 배 더 맛난 버거로 나를 꾸짖었다. 고기는 부드럽고, 양념은 질질질, 갈릭 프라이는 기름기름. 포장지는 기름에 반질반질. 맥주는 쾌적하게 콸콸콸. 그깟 건강 닥치세요. ‘막장 쾌락’이 버거 하나에 가득 담겼다. 감히 세이크쉑이 나댈 버거가 아니다.

술퍼마시고 늦게 들어온 거면, 대충 옷 벗고 망나니처럼 잘 것이지. 왜 낙엽 밟는 소리를 내며 옷을 벗고 그래? 한 명씩 순서를 정해서 밖에서 씻고 오지 말라고. 나, 잠 다 깼어. 아이폰이라도 볼까? 그냥 방 안 샤워실 쓰라고. 그래야, 나도 맘 편히 코를 골 거 아니야. 내 코골이 지수는 위험하다. 터질 것 같은 슈퍼두퍼에 맥주도 한 병 다 마셨다. 갈릭 프라이도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피곤할수록, 과음과 과식을 한 날일수록, 코를 골 확률이 높아진다. 콧구멍까지 홀쭉해졌으니, 90프로 코를 골게 돼있다.

새벽에 부릅 눈이 떠졌다. 심장이 철렁! 내 코골이 소리에 놀라서 깬 건가? 침착하자. 그런 경우, 드르렁 소리를 기억해 낸다. 아무 기억도 안 난다. 안 골았다. 골았을지도 모른다. 얘네들이 정신없이 자고 있으면, 내 코골이는 문제가 아닌 게 된다. 다른 침대의 두 명은 쌔근쌔근. 들린다. 잘 자고 있다. 내 위 독서 청년은 안 들린다. 나 때문에 아예 잠을 포기한 건가? 너 혹시 예민한 프랑스 수학 천재니? 진짜 도미토리 지긋지긋하다. 가난이 죄지. 독방에서 마음껏 코를 골다, 내 코골이에 부르르 눈을 뜨고, 거 새끼 코골이 우렁차네, 머리 긁적이며 잠들고 싶다.

아침이 밝았다는 사실이 이토록 기쁘다니. 나는 죄를 지었다. 죄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코를 심하게 골았을 나를 상상하며, 재빨리 방에서 탈출했다. 1층 주방에는 코스트코에서 산 게 분명한 커피가 펄펄 끓는다. 시리얼, 우유, 땅콩잼, 누뗄라가 있다. 싸구려 숙소인데, 풍요로움이 크리스마스이브 파리바게트 부럽지 않다. 역시 미쿡이야. 와플 굽는 기계까지 있다. 누뗄라를 식빵에 짓이기며 오래오래 아침 식사를 했다. 나는 누군가를 기다린다. 프랑스 청년 셋. 온다. 심장이 벌렁벌렁. 나를 쌩까? 왜 내 얼굴이 훅 달아오르지? 나는 확실히 코를 골았어. 그렇다고 그런 경멸에 가득 찬 얼굴로 외면해? 톨레랑스 어디 갔어? 관대하고, 싸가지 없어야지. 그게 내가 생각하는 프랑스 놈이라고. 이놈들은 내가 나가자마자, 내 이야기를 한 거야. 한숨도 못 잤어. 너도? 너도? 밥이라도 먹자. 그런데 프로 코골이가 지은 죄도 모르고 밥을 처먹고 있네. 미뉴, 미뉴 하면서 앙탈을 부렸던 나를 죽이고 싶다. 울컥 서럽다. 이렇게는 못 산다.

“헤이, 굿모닝. 잘 잤어? 어제는 술 좀 마셨나?”

나는 달려든다.

“아냐, 술 안 마셨어. 몸이 안 좋아서.”


내 위층 고요하게 깨어있던 녀석이다.

“몸이 안 좋아? 왜?”

“시차 적응아 안 돼서. 잠이 와야 말이지.”

“나, 네가 죽은 줄 알았어. 아무 소리도 안 들려서.”

후회했다. 불필요한 말이다. 내가 귀를 쫑긋 세우고, 네 숨소리를 엿들었지. 다 들켰다.

“아, 정말 죽는 줄 알았어. 잠은 안 오지. 할 일은 없지. 나만 빼고 다들 잘 자지. 한숨도 못 잤어. 한숨도. 그런데 너, 어제 혼자 어디 갔었어? 뭐 먹으러 갔어? 무슨 일해? 너 왠지 재미있는 일을 할 것 같아.”

“나도 사실 묻고 싶었어. 너, 무슨 일해? 그냥 궁금해지는 사람이야.”

이마에 피도 안 마른 새끼들이, 아버지뻘한테 순서도 없이 질문을 퍼붓는다. 개인주의 끝판왕 프랑스인들이 이럴 수도 있어? 파격적으로 내가 궁금하거든. 동양의 신비, 매력 끝판왕은 허무한 결말에 입이 찢어진다. 조커처럼 웃고 싶은데, 참는다. 쉽지 않다. 태양왕 루이 14세의 교만한 사치가, 후손들을 잘 키웠네. 진짜 멋과 풍류를 본능적으로 구별해내는군. 내가 코를 골았어? 묻고 싶었지만, 참겠다. 약간 코를 골아도 되겠어. 그걸 악보에 옮기고, 영감에 찬 밤을 부르르 떨며 찬양할 아이들이야. 난 그저 존재할 뿐인데, 누군가의 음악이 되고, 상상이 된다. 오줌이나 싸러 갈란다. 이런 기분은, 이상하게 배설의 욕구로 이어진다.

“여행하면서 살아. 글도 쓰고.”

내 책 열 권을 일일이 이야기하면 뭐 하겠어? 이들의 호기심만 폭발한다. 나는 고양이니까. 나는 이제 좀 귀찮다. 오늘의 날씨가 궁금할 뿐이다. 또 다른 룸메이트 이야기를 하겠다.


폭풍 코골이 사내였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세상 끝까지 닿고 싶어서요. 작은 오체투지입니다. 여러분은 관중이고요. 세상 끝까지 닿기 위해서 아주 작은 도움이 절실해요. 예를 들면 가까운 도서관에 박민우의 책들이 있나? 없다면 신청할까? 학교에도? 군부대에도? 네, 기적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거죠. 미리 감사드려요. 2019년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를 알리고 있습니다. 9년간 방콕에 머물면서 즐겨갔던 단골집, 카페, 태국 음식 이야기입니다. 군침도 돌 거고요. 의외로 재미도 있을 겁니다. 즐겨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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