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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거지, 정엽아! 너는 굶어도 싸.

나이 먹은 거지 여행자는 약간은 맘이 찢어지는구나.

by 박민우

“전, 정말 가난해요.”

"전, 진짜 너무 가난해요. 그걸 사 먹을 돈이 없어요. 거길 갈 돈이 없어요."


이 새끼는 왜 이리 돈타령이야? 젊은 박민우냐? 나와 비교하기엔 너무 뽀얗고, 멀쩡한데. 사립 초등학교와 어린이 스키 캠프를 착실히 수료한 얼굴로, 무슨 거지 코스프레야?


“오늘은 이 컵라면으로 때우려고요."

청중이 고작 나 하나인데, 혼신의 열연을 하는고만. 연영과 학생인가? 일본 니신 컵라면을 상표가 보이게 돌려서는 굳이 보여준다. 자기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한국 어르신에게, 가난을 호소하는 이유가 뭘까? 진실을 알고 싶지 않다. 절반이나 남은 초대형 나초칩 봉지를 들이밀었다. 새 거는 아니지만, 살사 소스까지 첨부해서 공손히 드렸다. 정엽이 입꼬리가 울라프처럼 올라간다.

“아, 정말 괜찮은데.”

제기랄, 마침, 가지고 있던 안 마신 오렌지 주스와 프랑스 친구들이 남기고 간 덴마크 쿠키도 재빨리 안겨드렸다. 돈까지 쓰고 싶지 않은, 중년 아저씨의 발악이었다.

“제대하고 바로 미국으로 왔어요. 너무 와보고 싶었 거든요. LA에서 열흘 있다가 이곳으로 왔어요. LA에서 돈을 너무 많이 썼어요. 제가 멍청했죠. 디즈니랜드에서 버스만 안 놓쳤어도… 버스를 놓치고 택시를 탔어요. 그날 100달러도 더 썼어요. 다, 제 잘못이죠.”


멍청하긴. 그냥 버스를 쫓아달라고 했으면 10달러에도 가능했을 텐데. 버스를 놓치면 택시로 버스를 추격할 것. 남미에서 몇 번 해봤지. 지혜가 거저 얻어지는 거겠니? 좀 더 늙고, 좀 더 배가 나오면 지혜 주머니에 뭐라도 담긴단다. 제대를 했어도, 아기는 아기지. 아기는 얼마나 디즈니랜드가 재미났을까? 나는 LA에 가면 디즈니랜드를 갈까? 내 돈 주고는 안 갈 것 같다.

“브루노 마스 콘서트를 안 봤으면, 그래도 햄버거는 먹을 수 있을 텐데.”

어르신 저 햄버거 좀 먹여 주시죠를 돌려 말한 거냐? 에이, 설마. 설마 얻어먹겠다는 놈이, 브루노 마스 콘서트 이야기를 하겠어? 브루노 마스 공연까지 잘 보았습니다. 청년 정신으로 탕진했으니, 이제 내게 햄버거를 먹여 주시오. 요즘 청년이 이리 몰지각하고, 요령 없을 리 없지. 그냥 주저리주저리 하고 싶은 말을 병렬식으로 늘어뜨려 놓은 것일 뿐. 지금 혼자 맛난 거 먹으러 갈 참인데, 죄책감 느낄 필요 없겠어. 니신 컵라면이라잖아. 컵 알못(컵라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딱하게 여기지, 꽉 찬 건더기, 담백한 국물, 과자 같은 면발. 일본 면의 자존심이자 라면계의 붙박이 장승같은 라면이거든.

그날 나는 Tacorea 식당을 갔다. Taco와 Korea가 합쳐진 Tacorea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핫한 맛 집이다. 한국의 젊은 사장은 멕시코 음식에 한국 맛을 섞는다. 대표 메뉴는 김치 부리또. 볶은 김치, 제육 볶음밥, 숙주를 토르티아(옥수수나 밀가루로 만든 전병)에 한꺼번에 올리고 꾹꾹 만다. 한 입에 절대 들어가지 않는 두께에 한국 맛이 가득하다. 한국인에게도 얼얼할 정도로 맵다. 그 식당에 다녀온 이후로 한국인 사장이 내 인스타를 팔로우하고, 인스타 라이브도 곧잘 들어온다. 그런 깨어있는 사람이니까 이런 맛을 내는 거지. 한국인 입맛에 약간 짜지만, 안 짜면 미쿡사람, 멕시코 사람 등 돌린다. 맥주잔을 들게 하려고, 염분을 투척합니다. 모르셨습니까?

쌔근쌔근 잠든 정엽이 얼굴이 정말 아기 같다. 정엽이가 이십 대 초반일 테고. 내 나이가 마흔여섯. 파렴치한 아빠는 정엽이 컵라면 먹이고, 김치 부리또 먹었드아. 맨 정신으로는 해서는 안 될 일이지. 그래서 맥주도 한 잔 했단다. 사실 나머지 반은 남았지만, 내일 점심때 아빠가 또 먹고 싶을 것 같아. 주고 싶은 마음은 분명 있거든. 먹고 싶은 마음을 이길 정도는 아니야. 점심때 네가 주방으로 들어오면 그땐 줄게. 꼭 줄게. 그런데 어딘가를 싸돌아다닐 거지? 그러니까 안 준다는 거지. 너무 미안해서, 인터넷으로 자전거를 빌렸다. 정엽이 이름으로. 23달러. 거금을 썼다. 그래, 정엽아. 자전거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마음껏 휘저으렴. 아빠 진짜 큰돈 쓴 거야. 내 전 재산의 2.5%를 쓴 거야. 알아줄 거지? 그제야 좀 소화가 됐다.

그리고 다음날, 정엽이를 먹일 기회가 찾아왔다.

“죄송한데요. 남에게 신세를 지는 건 제가 정말 못 하겠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또 뭐야? 형처럼 보이겠지? 내가 너무 어려 보여서, 말 깔까 봐 걱정했더니, 선생님? 난 세상에서 리얼리티가 제일 싫다고. 이 새끼야. 인도 부자 청년 스텝(사람 이름이다)도 나도 당황했다. 코골이 대장이 스텝이 정엽이 밥을 먹인 이야기가 이어진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작은 오체투지입니다. 세상 끝까지 닿고 싶은 욕심으로 하는 오체투지죠. 혹 제가 갸륵하다 느껴져서, 가까운 도서실, 학교, 복무 중인 군부대에 박민우의 책들을 신청해 주실까 봐요. 2019년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를 알리고 있어요. 9년간 방콕에 머물면서 단골집이 좀 많았겠어요? 맛집들 태국 음식 이야기를 조곤조곤 옮겼답니다. 즐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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