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텝이 사라졌다. 싱가포르 청년이 스텝의 침대를 차지하면서 확실해졌다. 3일을 묵겠다던 친구가 하루만 묵고 사라진 것이다. 일 때문일 수도 있다. 여자를 만났을 수도 있다. 뜨내기들이 잠시 머무는 곳에서, 흔한 일이다. 마음 바뀌면 이 숙소, 저 숙소 옮긴다.
트윈 픽스에 올랐을 때, 엄청난 바람에 입이 안 다물어집디다.
나는 이태원 게스트 하우스에서 남의 배낭에 오줌을 쌌다. 이따위 치욕적인 비밀을 내뱉고 싶을 리 없다. 오늘의 글은 내 치욕이 필요하다. 술을 마시고 기억이 끊긴다는 이들을 대부분 의심했다. 기억이 안 나는 척하는 거지. 술 마시고 행패 부리는 이들을 경멸했다. 알코올의 노예가 되어, 미안하단 말로 퉁치려는 야만의 존재. 안 마실 수 있는데도, 마시고 사고 치는 미개인들. 큰 실수가 없었던 나는 당당하게 그들을 혐오했다.
집이 경기도 광주인 나는,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과 이태원에서 모처럼 달렸다. 주는 술 다 받아마셨다. 다시 대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자면 심야 택시보다 싸니까, 이태원 게스트 하우스 도미토리를 예약했다. 아침이었다. 누군가가 깨워서 억지로 눈이 떠졌다.
“어제 다른 손님 배낭에 오줌 누셨어요. 방에서 소리도 지르고, 사람들 다 깨우고요. 기억하시죠?”
숙소 주인은 2층 침대로 얼굴만 빼꼼 내밀고 조곤조곤 사실을 전했다. 꿈 비슷한데, 꿈은 아니었다. 사장을 따라 리셉션으로 갔다. 단두대에 처형당하러 가는 기분이었다. 리셉션에 벌을 서 듯 서서는, 아, 그런 일이 있었나요? 아, 정말 그랬어요? 머리를 긁적였다. 술기운이 조금씩 떨어지면서, 치욕이 용암처럼 밀려들었다. 끓었다.
“그 손님이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어요. 연락처를 남겨 두세요.”
한국이 궁금했던 한 외국인 여행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굳이 아래칸에 내려와서 자신의 배낭에 정조준 오줌을 누는 미친놈을 만난다. 그 후로 아무 연락이 없었다. 내가 한 번 더 전화를 했지만, 연락하겠다는 말뿐이었다. 그리고 상황은 종료됐다. 치욕스럽게도, 나는 용서받았다. 내가 모조리 파괴되었다. 지금까지 믿고 있던 나는 내가 아니었다. 나의 자신감, 나의 글, 나의 사상은 모두 부서졌다. 알코올에 절어서, 누군가의 배낭에 오줌을 갈기는 추한 생명체가 나였다. 이런 나를 어떻게 곁에 두고 사나? 내게 남은 수명이 길게 느껴졌다. 친구였다면, 어깨를 두드려줬겠지만, 내 일이 되니, 나를 죽이고 싶었다. 그래서 이 치욕이 소중하다. 차마 내뱉지 못하는 치욕도 내겐 더 있다. 누구에게라도 있을 것이다. 나의 치욕이 누군가에게는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허물없는 인간이 없고, 약하지 않은 인간이 없다. 우리는 치욕을 산다.
스텝은 그다음 날 돌아왔다.
“인도 친구네서 잤어. 짐? 아, 출장 와서 작은 배낭이 전부야. 일 보려면 가지고 다녀야 해서. 그런데 왜 내 침대에 다른 사람 짐이 있는 거야?”
나만 우스워졌다. 새벽에 사라진 나 때문에, 스텝이 자신의 코골이를 알게 된 줄 알았다. 치욕스러워서 다른 숙소로 도망간 줄 알았다. 나만 우스워졌지만, 어젯밤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저 선생님, 스텝이 선생님도 꼭 가셔야 한다는데요. 샤워 끝내시면, 나오세요.”
아니, 이 미친놈들이 진짜! 저녁 먹으려면 둘이서 가라고. 밥 먹었다고 여러 번 말했다. 샤워를 끝내고 나니, 정엽이와 스텝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왜, 주문을 안 받는 거야?”
처트니(Chutney)라는 인도 식당이다. 처트니는 인도식 과일소스 혹은 잼을 말한다. 그걸 빵에 발라 먹으면, 상큼함이 뚝뚝 떨어진다. 침샘이 절로 솟는 시큼함. 이름 때문에 잠시 기분이 좋아졌다. 스텝이 배가 많이 고픈지, 짜증을 낸다. 옆 테이블의 다른 손님이 카운터 쪽을 가리켰다. 카운터로 직접 가서 주문하라는 뜻이다. 정엽이가, 성실하고, 열정적인 뜀박질로 카운터로 달려간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기 인도 사람이 하는 거 맞아? 돈을 내는데, 왜 주문을 안 받아?”
브라만 귀한 아들 스텝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염소 커리, 치킨 버터 마살라 커리, 버터 난이 나왔다.
“이거, 인도 맛이 아니야. 뉴델리에 가면 내 단골집이 있는데, 여기와는 비교가 안돼! 여기 파키스탄 사람이 하는 걸 거야. “
멍청한 브라만이 입을 함부로 놀리는 동안, 나는 식은땀이 났다. 총을 소지한 파키스탄 사람이 옆 테이블에 있다면,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 총은 그럴 때 쓰라고, 하나씩 장만해 두는 거야. 여긴 미국이라고. 이 멍청아!
“저, 선생님 이렇게 맛있는 카레 처음 먹어 봐요.”
정엽이는 일회용 그릇까지 챙겨 와서 남은 음식을 담았다. 너무도 당연하게 돈 낼 생각을 안 해서, 안심했다. 정엽이는 내게 천하의 ‘가벼운 새끼’가 되었다. 남에게 신세를 너무 잘 지는 놈이, 신세지는 거 부담스럽다고 했다. 거짓말은 아니다. 그런 마음도 있고, 아닌 마음도 있다. 섞인 마음이 인간이다. 일관성 없고, 잘 먹고, 호들갑 잘 떠는 사람은 여행 다니면 된다. 방정맞은 변덕은, 길이 알아서 받아준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워지면 된다.
“너, 어디 갔었어? 새벽에”
라씨(인도 요구르트)로 후식까지 두둑이 챙겨 먹은 스텝은 아껴둔 본론을 꺼냈다.
“일어났더니 너 없더라? 아침에 안 들어왔지? 좋은 데 간 거야? 여자?”
음흉한 표정으로 낄낄댄다. 나는 할 말이 없다. 낄낄대더니, 웃음을 멈춘다.
“나, 혹시 코 골았어? 심하게 골았어? 못 잘 만큼? 내 여자 친구들도 못 잤을까? 여자 친구가 네팔로 떠났어. 미국엔 미친놈만 산다고 못 살겠대. 우린 약혼한 사이였다고. 나 코 골아? 엄청 크게 골아? 그녀는 혹시 내가 코를 골아서 떠났을까? 솔직하게 말해줘야 해. 그녀가 그것 때문에 떠났으면 좋겠어. 아니, 설마 그것 때문에 떠났을까? 나 코 골아? 심하게 골아?”
브라만 왕자가 처음으로 작아졌다. 침을 삼키고, 내 답을 기다렸다.
“골기는 하는데, 엄청 시끄러운 건 아니야. 새벽에 잠깐 나갔던 거야.”
아니길 바라면, 아니어야지. 스텝은 진실을 원하지 않는다. 세상은 순조로워야 한다. 스텝은 아니라고 하지만, 당장 처형당하고 싶지 않다. 단두대에 오르는 날이 꼭 오늘일 필요는 없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작은 오체투지로 세상 끝까지 제 글이 닿기를 꿈꿔요. 어서 오세요. 저의 바람에 조금 가까워졌어요. 당신을 만났으니까요. 와, 2019년도 이제 다 썼네요. 2019년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를 알렸어요. 9년간 방콕에서 머물면서 발견한 단골집, 태국 음식 이야기를 채운 책이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냥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