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아도 되는 곳을 가는 이유, 그냥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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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왼쪽으로 가도 되고요. 오른쪽으로 가도 돼요. 샌프란시스코는 바둑판 모양이니까요. 반대쪽으로 멀어지지만 않으면 돼요. 팔자 좋은 놈이죠. 큰맘 먹고 나서는 길이 맛집 탐방이라니요.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 이 말을 참 많이 들었어요. 오기로라도 맘대로 살겠습니다. 그런 건 아니었어요. 딱히 대단한 확신도 없었고요. 견디는 걸 못할 뿐이죠. 저처럼 못 견디는 사람도 드물지 싶어요. 북촌동 피자집에서 낯선 분들과 차례로 인사를 하다가 턱이 빠졌잖아요. 한 세 명 모여서 밥 한 끼 하는 줄 알았다가요. 줄줄이 등장하는 새로운 사람들과 인사하고, 제 소개하다가요. 턱이 빠진 거예요. 피자를 먹으려고 입 벌리다가요. 설마 이 자리가 불편해서? 누구보다 뻔뻔한 인간이거든요. 세계 테마 기행 촬영할 때면요. PD, 카메라 감독님 다 놀라요. 카메라만 돌아가면, 기계음처럼 나불대거든요. 뜸 들이는 법도 없어요. 그냥 튀어나와요. 저는 좀 신들렸어요. 혀만요. 그런데 이제 아닌가 봐요. 태국 방콕에 살아서 면역성이 떨어진 걸까요? 그날 제 자신에게 엄청 실망했습니다. 전생에 거미줄이었나요? 거미 말고 거미줄요. 선풍기 바람에도 끊어질 듯 휘청대는 거미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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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해도 된다. 못 끝내도 된다. 여기엔 큰 힘이 있어요. 큰 힘이 됐어요. 언제라도 그만두지 뭐. 제 여행은 다짐이 아니라서요. 곧 허물어질 다리라서요. 휘청이기만 했어요. 무너지지 않았죠. 평생 여행만 해라. 그랬다면 못 했을 거예요. 감옥이었겠죠. 왜요? 여행도 감옥 될 수 있죠. 기껏 떠나온 곳이 지겹고, 후회된 적이 왜 없었겠어요? 하기 싫을 때 그만하기. 이게 어찌나 큰 힘이 되던지요. 호박 수프를 끓인 날이었어요. 맛있게 잘 됐어요. 코코넛 밀크를 조리고, 호박, 고구마, 브로콜리에 물도 좀 넣어서 끓여요. 생강 다진 거 약간, 버섯 스톡 넣고 마저 끓인 후에 갈아줘요. 호텔 수프 저리 가라더군요. 우유 없이, 치즈 없이도 고소하기만 해요. 양이 문제였어요. 남기기엔 적고, 끝까지 먹으려니 배부르고요. 음식 버리면 안 되잖아요. 끝까지 먹어야죠. 먹다가요. 이건 아닌 거예요. 큰 깨달음이라도 온 것처럼요. 잠시 멍해져요. 그 맛있는 수프를 싱크대에 다 버렸어요.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음식을 버리냐고요? 그 아이들이 걱정되면 기부를 해야죠. 우리의 감옥은, 우리가 만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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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맛 집을 가는 거지만,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중요해요. 구글맵에서 가라는 대로 가지 않으려고요. 못 가본 골목을 지나치고 싶어요. 안 가도 되는 길이니까 가고 싶어요. 별 볼 일 없을 걸 알지만 괜찮아요. 그래서 저는 왼쪽으로 틉니다. 멕시코 식당, 파키스탄 식당, 인도 식당, 신장 위구르 식당, 태국 식당, 에티오피아 식당이 보이네요. 위구르 식당이라니요? 중국 서쪽 끝에 있는 신장 위구르 사람이 여기까지 와서 식당을 차렸네요.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고요. 중국 정부를 굉장히 싫어해요. 반정부 시위도 많고, 흉흉한 소문도 많죠. 거대한 수용소를 만들어서 위구르 사람들을 순한 양으로 세뇌시킨다는 소문이요. 자유를 위해 이곳에 왔을 거예요. 고향이 그립지만, 갈 수 없는 고립감이 크겠죠. 식당에 손님이 없네요. 누군가가 안에서 담배를 피우네요. 아, 바로 옆 이 건물은 뭔가요? 한국 룸살롱 간판이네요. 낡은 걸 보니까 가게는 문을 닫았나 봐요. 욕망이, 유흥이 80년대에 머물러서 쓸쓸해 보여요. 미국은 정말 작은 지구네요. 이 짧은 거리에, 사연 많은 지구인이 복작복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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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Larkin 거리로 들어가야 하는데요. 한 블록을 더 가요. Polk거리로 들어가요. 한 식당에 줄이 기네요. Mayes oyster house라는 식당이네요. 이름만 봐도 알겠죠? 굴 전문 식당이에요. 메뉴를 검색해 보니까요 굴을 개수로 팔아요. 개당 2.25달러에서 3달러네요. 3달러짜리 제일 비싼 굴이 일본 구마모토 굴이로군요. 구마모토랑 통영이랑 안 멀어요. 구마모토 굴은 구마모토에선 멸종됐대요. 그걸 미국에서 양식에 성공해요. 살려내죠. 구마모토 굴을 먹으려면 미국에 가야 해요.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 그래서 더 재미나죠? 통영 굴이나 구마모토 굴이나 모두 태평양 굴이죠. 굴은 어느 나라나 귀해서 개수로 먹어요. 우리나라만 유일하게 무게로 먹는대요. 굴을 배불리 먹는 말 도 안 되는 나라인 거죠. 통영 굴 양식장에서 나오는 굴이 전 세계 생산량의 5%랍니다. 어마어마합니까? 이제 굴짬뽕, 굴 국밥, 굴 무침 드실 때 묵념 3초 하고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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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 아이스크림 집에 들어갔더니, 주인이 안 보이네요. 재빨리 도망 나와요. 아, 그래요. 먹고 싶어서 들어간 건 맞아요. 주인이 안 보이니까 그 시간이 2분 가까이 되니까요. 생각이 많아져요. 먹고 싶었던 마음도 시들해지고요. 주인이 나타나면 주문해야 해요. 안 먹고 싶어요. 꼭 안 먹어야겠어요. 괜히 CC TV 있나 두리번거리고, 뛰쳐나와요. 왜 뛰죠? 왜 의심 살만한 행동을 할까요? 펍에서는 손님들이 야구를 봐요. 다들 꼼짝을 안 해요. 언제까지 안 움직이나 보자. 저도 한참 서서 봐요. 사람들을요. 제 여행이 그래요. 실없고, 싱겁죠. 식당 Cordon bleu 이야기는 언제 하냐고요? 낚은 거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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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싸 보이는 식당에서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구경해요.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지기는 해요. 여행 초보일 때는요. 백인들만 가득한 식당이, 넘봐서는 안 되는 궁전처럼 보였어요. 이젠 안 그래요. 가서 먹으면 되죠. 저도 한두 번은 기분 낼 수 있어요. 그냥 그 풍경이 좋아요. 한 여름도 한겨울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아늑하고, 화려해요. 가장 완벽했던 그때의 크리스마스 같아요. 아, 그 생각도 해요. 좋은 식당일수록 팁도 많이 내야 하잖아요. 팁을 받는 사람보다, 팁을 주는 사람이 훨씬 가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요. 저처럼요. 제가 팁을 준 사람에게 저의 형편을 들켜보고 싶어요. 팁을 후하게 준 사람이, 알고 보니 노숙자 직전의 거지였던 거죠. 그래서 뭐, 어쩌라고? 죄책감이라도 느끼라고? 아뇨, 아뇨. 그냥 세상이 이토록 입체적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팁을 주는 손님에겐 백 가지 사연이 있다는 걸요. Polk 거리가 너무 좋아요. 들어가고 싶은 카페뿐이네요. 식당뿐이네요. 제가 많이 들떴죠? 술 없이 술기운이 도네요. 저의 의도와 상관없이 살짝 대단해진 Cordon bleu 이야기는 꼭 할게요. 약속!
PS 매일 글을 씁니다. 저의 작은 오체투지입니다. 글로 지구인 모두와 인사하고 싶습니다. 반갑습니다. 우리 처음 보는 사이인가요? 아니라고요? 더 반갑습니다. 오랜 인연이 주는 자기장에, 갇혀서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보호하고, 보호받는 존재들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