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리주저리, 소소함이 지나친 일기

그래요. 이렇게 사소하게, 하루하루를 살고파요

by 박민우

2018년 한 여름의 작은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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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받은 빈폴 셔츠를 굳이 바꾸러 갔다. 어두운 색은 너랑 안 어울려. 어머니의 그런 단호함은 또 처음이었다. 수내역 롯데백화점으로 갔다. 선물로 받은 걸 바꿔도 될까? 환불은 사온 곳에서만 가능해요. 교환은 어느 매장이나 가능해요. 마음에 드는 걸로 입어 주세요. 그 말을 여러 번 했으니, 용기를 낸다. 영수증 없어도 교환이 되나? 어디서 샀죠? 구매자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이런 식으로 캐물으면, 겁나는데. 쇼핑이 내 삶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있던 옷 입고, 생기면 입고.


교환 가능합니다.


상자 열고 옷만 힐끔, 확인 끝. 그냥 되는 거잖아. 괜히 겁먹었어. 이마트에서는 당당한데, 왜 백화점에서는 긴장할까? 안 와 봐서 그렇지. 몇 번 더 오면 괜찮아지겠지. 파란색 셔츠를 고른다. 참 예쁜 색이다. 그 예쁜 색이 내 얼굴을 만나니, 칙칙해져 버린다. 파란색아 미안하다. 노란색을 입어본다. 파란색보다는 낫다. 겨자색은? 더 잘 어울린다. 집에 노란색 셔츠만 하나, 둘, 셋. 또 노란색? 분홍색을 입어본다. 분홍색도 하나, 둘. 집에 두 장 있다. 그래도 분홍색을 고른다. 점점 어울리는 색이 줄어든다. 어떤 색을 입어도, 괜찮을 때가 있었다. 옷 고르는 재미도 영원하지 않더라. 어쨌든 어울리는 색이 남아있다. 어울리는 색이 다 사라질 때가 오겠지. 그땐 좋아하는 색을 입겠다, 파란색, 바다 색, 하늘색. 남 보기에 좋은 색 말고, 내가 좋아하는 색. 70년대 탈영병인 줄 알았다. 빈폴 블루,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2

분홍 셔츠는 원래 셔츠보다 14,800원이 저렴하다. 양말 두 켤레를 사라고 권한다. 양말 두 켤레 15,000원. 차액은 200원. 수중에 200원은 없다. 200원을 깎아줄까?


-차액 200원 어떻게 하실 건가요?

-현금이 없는데요.

-카드로 결제가 가능합니다.


띠리리, 띠리리. 카드가 읽히고, 전표가 뽑아져 나온다. 빈폴은 그렇게 내게 200원을 가져갔다. 잘했어. 계산은 계산이니까. 그런데 200원 받고, VISA에서 수수료는 얼마 뜯어가니?


부자와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오성급 호텔 일식집. 식사가 끝났다. 계산서를 보더니 얼마 얼마로 하지. 가격을 깎는다. 계산서를 들고 잠시 사라진 웨이터는, 네, 말씀하신 가격으로 조정했습니다. 한다. 밥값을 깎아? 그것도 최고급 식당에서? 너무 당당해서, 그제야 그가 두렵고, 대단해 보였다. 200원 깎아주세요. 맴돌기만 했다. 입 밖으로 안 나왔다. 나는 백화점이 무섭다. 아디다스 트레이닝 바지 입고 명품 매장 오는 사람이 진짜 VVIP라던데.


3

분당 수내역 내부에 부산 어묵과 떡볶이, 순대를 파는 분식집이 있다. 이곳엔 천오백 원 컵볶이가 있다. 여러분은 떡볶이가 끝까지 맛있나요(갑자기 독자를 향한 방백)? 저는 몇 개 먹으면 지겹더라고요. 컵볶이가 딱이죠. 그런데 오늘 꼬치 순대까지 발견했어요. 역시 천오백 원. 순대와 떡볶이 세트를 삼천 원에 먹어요. 우앙! 지겨워지기 전에 다 먹어치울 수 있는 획기적인 양. 컵볶이와 꼬치 순대. 제가 만든 DIY 세트입니다.


-컵볶이 주세요. 떡은 조금만 주세요.


컵볶이가 얼마나 된다고, 그걸 조금만 달래? 아예 먹지를 마, 그럼! 내 옆의 여자는 나보다 떡볶이가 더 빨리 지겨워지는 모양이었다. 그럼 어묵을 더 드릴게요. 떡볶이 아주머니가, 떡볶이를 덜 담고, 빈자리를 어묵으로 채워준다. 지금 이거슨 꿈의 떡볶이!!!! 세상엔 당당한 사람이 참 많다. 일식집에서 값을 깎는 부자도, 컵볶이 양 조절하는 여자도, 너무 당당해서, 다시 보게 된다.


여기 어묵국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네 번 퍼 마셨다. 꽃게도 보이고, 마른 황태도 보이고, 마른 고추도 보이는 엄청난 국물이다. 작은 하루에서 두근거림 찾기. 매일 글을 올리는 이유다. 물론 내가 요즘 모양 빠지는 일들로, 칙칙, 우울했지만, 원래는 소소함으로 기뻐하는 나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 국물이 좋은 예다. 한 번 더 먹을까? 두근거렸다. 그런데 아주머니 너무 뚫어지게 보신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여기 삼천 원. 내일 먹으러 와야지. 떡볶이 떡 조금만 주세요. 나도 그거 해볼 거야. 떡볶이 소믈리에가 된 기분. 떡믈리에라고 해야 하나? 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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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요금제를 데이터 무제한 65,000원짜리로 바꿨다. 이전엔 한국에 있어도 폰번호 없이 살았다. 아이폰으로 공짜 인터넷만 그냥저냥 썼다. 무선 인터넷 인심은 LG가 제일 후하고, SK가 제일 야비하다. T free wifi. 요게 SK거. 있으나 마나. Free지만 Free하게 연결되는 경우가 없다. 내 신상 정보 동의(이런 의미 없는 협박, 머리만 아프다), 정보 활용 동의, 이것저것 동의해도, 인터넷은 먹통이다. LG와 KT가 공짜 손님에게도 Free한 wifi를 제공한다. 통신사를 어디로 고를까? 어머니, 아버지가 이미 SK. 공짜일 때 야박한 것들은, 돈 내면 굽실대지. OK, SK. SK야 내 앞에 무릎 꿇어! 65,000원 손님이시다.


7월에 쓴 요금제는 3만 9천 원짜리. 데이터 1.2기가. 방심하면 일주일 안에 다 닳아버리는 참으로 알량한 양. 늘 데이터 꺼 놨다. 필요할 때만, 수돗물 틀 듯, 조심조심 데이터를 틀었다.

65,000원. 7월보다 25,000원 정도를 더 쓰는 셈이다. 삶이 달라졌다. 집에서 잠들 때 굳이 공유기를 끄러, 작은 방까지 갈 필요가 없다. 구질구질 와이파이 왜 써? 그냥 속 시원한 LTE 로 인터넷 세상을 날아다닌다. 연예인 가십을 자장가 삼아, 아기 푸들처럼 잠든다. 지하철에서 유튜브를 보고, 미국 드라마를 본다. 부의 상징처럼 느껴져서, 사람들이 내가 뭘 보나 봐줬으면 한다. 25,000원을 쓰지 않았던 삶은 참 찌든 삶이었다. 그때로 못 돌아갈 것 같다. 가난하면 피곤하고, 가난하면 바쁘다.


푼돈 25,000원으로 이렇게 삶이 달라지는데, 부자가 되면 얼마나 행복할까? 가난뱅이 시절로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겠지. 돈이 최고인가? 돈이 최고다. 지금은 최곤데, 얼마나 갈까? 데이터 무제한의 기쁨은 곧 당연해질 것이다. 하나도 안 재밌어질 것이다. 유효기간이 없는 짜릿함은 없다. 즐거울 때까지 즐겁기. 아닐 때 눈치 까기. 멈추기. 그걸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아니다 싶을 때, 나 안 해. 쿨하고, 과감하게 내팽개치기. 나는 이토록 현명하니까, 데이터 죽돌이어도 된다. 이탈리아 아말피 해변 그물침대에서 SK 로밍 서비스를 무제한으로 쓸 테다. 멜론 차트 100을 모조리 들을 거야. 없는 것들이나, 와이파이 비밀번호 뭐죠? 이탈리아 말로(살짝 멋있군)? 가난한 것들은 바쁘다. 피곤하다. 그래서 말도 빨리 배운다. 구차하게, 쯧쯧쯧


PS 매일 글을 씁니다. 쓰면서, 놉니다. 쓰면서, 늙습니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채워지면, 결국 저는 기다란 다리 하나를 세상에 연결한 사람이 돼요. 더 많은 사람이 건널 수 있겠죠. 나를 읽고, 세상을 읽었으면 해요. 그런 다리가 될 수 있게, 매일 벽돌을 올려요. 벽돌로는 다리를 못 짓나요? 아, 몰라요. 그냥 다리라고 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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