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한 하루만큼 좋은 하루는 없다
(2018년 여름의 기록입니다)
'오늘의 황홀'을 쓰면서, 순간을 꼼꼼하게 바라보게 된다. 시간을 잘 써야겠단 생각도 한다. 잘 쓴다는 건, 미루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질렀다. 아이폰에서 나오는 에어팟 말고 엔트리 원더 캡슐 25로. 에어팟은 16만 원대. 엔트리 원더 캡슐 25는 79,000원. 절반 가격이다. 후기가 좋다. 후기를 믿을 것인가? 인터넷 여론, 작전과, 사기의 온상. 100명만 모이면, 대세가 된다. 4일 이내 무료 반품. 4일간 두 눈 부릅뜨고 써볼 거다.
이런 것 하나도 제대로 된 정품을 못 사는 신세. 나, 진지하다. 좋은 거, 최고인 거 일단 질러야 한다. 싼 것만 찾으면, 피자나라 치킨공주 같이 된다. 둘 다 맛있지만, 최고로 맛있진 않다. 피자왕자, 치킨공주가 아니고 왜 피자나라 치킨공주야? 피자나라, 치킨왕자보다는 낫지만…. 피자 임금, 치킨 중전마마는? 나만 웃긴가? 내 개그가 이렇게 늙어가나? 오래간만에 깔깔깔, 유머1번지, 쇼비디오자키스럽게 웃었다.
무선 이어폰의 가벼움, 자유로움에 빠져들고 싶다. 결국 가벼움이다. 무선 이어폰의 지혜를, 욕심을 멀리 하는 자가 되고 싶다. 미니멀 미니멀. 선부터 없앤다. 무선 청소기, 무선 충전기, 무선 키보드. 내 소유물의 선을 모두 없애겠다. 그러고 나서, 욕심을 없애겠다. 믿어 달라.
요즘 밥상엔 소시지 반찬이 계속 올라온다. 어머니 친구의 사위가 냉동식품을 유통하는데, 좋은 제품을 장모님께 드린다고 한다. 유통기간은 꽤 남은, 좋은 것만. 그게 우리 집까지 왔다. 어머니는 이마트에서 두 개 붙여서 육천 원에 파는 거라며. 엄청 뿌듯해하신다. 소시지에 들어가는 아질산나트륨은 1급 발암물질이다. 내 돈 주고는 안 사 먹는다. 어머니랑 즐겁게 먹는 중이다. 아니 그럼, 공짜 소시지를 버려? 어머니나, 나나 천하의 패륜짓이라 생각한다. 발암물질 먹겠다. 맛있게 먹겠다. 실제로 너무너무 맛있다. 꿈의 도시락 반찬 아닌가? 부잣집 아이가 뚜껑을 열면, 고작 한두 개나 자기 입으로 들어가는 소시지 반찬. 안 뺏기려고 주먹이 오가던, 서글픈 소시지 반찬. 근본 없는 하이에나들이 수유중학교 2학년 15반에 그리 많이 살았다. 어머니도 나도 그때의 한을 푼다. 먹어도 먹어도 안 주는 마법의 소시지. 수유중학교 거지들아 우리 집으로 와라.
오후 네 시. 나가기엔 늦은 시간. 열린 창으로 바람이 든다. 끝만 살짝 차가운 바람. 부암동으로 간다.
다산북살롱에서 여행학교를 시작했다. 부암동을 돌아보고 여행기를 쓰시오. 숙제를 내줬다. 나도 한다. 똑같이 숙제하고, 돌려본다. 함께 성장하는 시간이었으면 한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두 시간. 부암동으로 간다.
세종문화회관에서 내린다. 한 번 더 버스를 타야 한다. 노천카페가 보인다. 엔제리너스. 롯데에서 하는 카페다. 롯데에 딱히 호감은 없다. 솔직히 안 좋아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너무 마시고 싶다. 엔제리너스가 눈앞에 있다. 부암동에 가면 좋은 카페가 많겠지. 가장 먹고 싶은 순간은 지금이다.
Syrup. SK텔레콤 전자지갑이다. 엔제리너스도 할인이 될까? 헉, 아이스 아메리카노 공짜 쿠폰? 이 멍청아! 순순히 공짜겠어? 아니야, 아니야. 엔제리너스 어플 다운로드하고 카드 번호 받으면 공짜라잖아. 열심히 살자. 카페 앞에서 카페 어플부터 다운로드하는 거, 이런 푸릇한 지질함. 이딴 식으로 회춘하겠다. 다운로드하고, 카드 번호 받았다. 자, 나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다오.
가입 후 다음날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적립됩니다.
아오, 개수작, 롯데 새끼야.
할인은 되지 않을까? 15% 할인 쿠폰, 있다. 다운로드한다.
“할인을 받으시려면 본점으로 가셔야 합니다.”
본점은 뭐야? 본점 딱 한 곳에서만 할인이 된다는 거야? \
"그냥 주세요."
급격이 늙어져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았다. 대한민국 최고의 노른자 상권에서, 왜 할인을 바라? 박민우, 등신아. 너 같은 애들을 제물로 삼아, 잠실 타워를 올렸다고. 모질아!
부암동으로 가는 버스. 두 명의 노인이 나란히 앉았다. 한 노인이 벌떡 일어나더니, 옆 자리로 옮긴다. 젊은 여자가 앉아있는 자리로. 허허. 이유는? 굳이? 노인의 얼굴엔 검버섯이 가득. 젊은 남자가 그 둘이 있는 자리로 간다. 젊은 여자와 이야기를 한다. 여자가 일어선다. 아는 사이? 둘은 서서 가기로 한다. 꼭 붙어서 조잘조잘. 같은 반지를 끼고 있다. 잠시 떨어진 이유는 모르겠지만, 둘은 연인 아니면 부부. 검버섯 노인은 젊은 여자가 사라진 자리를 잠깐 본다. 창가로 옮겨서 창밖만 본다. 너무 표정이 하나여서, 애쓴다는 느낌이다. 나만 이 상황을 느낀다.
계열사. 부암동의 치킨집. 생활의 달인 10대 맛 집. 스티커가 붙어 있다. 식당은 꽉 차 있고, 나만 혼자. 한 명이요. 자리를 차지하고, 2만 원짜리 프라이드치킨을 시킨다. 튀김옷이 두껍지 않고, 바삭하다. 당당하게 치킨 한 마리를 놓고, 맛에 집중한다. 나는 소심한 사람인가? 남들 시선이 아무렇지도 않다. 옛날 통닭 느낌으론 이보다 맛있긴 힘들겠어. 바삭함에 사실 좀 놀랐다. 종업원 한 명이 숟가락을 떨어뜨린다. 땡그랑. 작작 사고 좀 쳐, 새끼야. 머리를 단정하게 빗은 할머니다. 사장님인 듯. ‘새끼’ 억양과 발음이 찰지다.
치킨 절반을 싸들고 나온다. 건너편은 자하 손만두. 내 인생 가장 싱거운 음식. 자하 손만두 만둣국. 줄 서는 집이다. 미슐렝 가이드에서 별을 받은, 세계적 맛 집. 나에겐 주입식 맛 집. 이곳에서 배운 지혜는 느긋함이다. 처음엔 대부분이 싱겁다 했을 것이다. 재방문까지 오래 걸렸을 것이다. 폭발적이지 않아도, 자극적이지 않아도, 좋은 재료와 진심이 담기면 사람을 모은다. 진심을 담기. 앞으로 내 글은 더 쉽고, 더 밋밋해질지도 모른다. 시간을 뛰어넘는 가치는, 당장은 모른다. 안 보인다. 오래오래, 씹으면, 씹을수록. 우러나오는 뭔가가 있으면 된다.
길을 걸으면서 싸가지고 나온 절반의 치킨을 뜯는다. 치킨을 봉투에 숨기고, 빼고, 먹고, 숨기고. 헐떡헐떡. 상큼한 바람, 부암동. 박노해 사진 전, 카페, 갤러리. 언덕, 골목, 치킨. 그래도 치킨 무는 안 건드렸어. 마지막 자존심. 1인 1닭. 내 식탐은 젊기도 하지. 내일 무선 이어폰이 왔으면 좋겠다. 오늘 같은 바람이 내일까지 불었으면 좋겠다. 자전거를 타고, 선 없는 이어폰으로 에드 쉐런 노래를 들어야지. 바람이 분다. 어떤 노래여도 된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안녕하세요. 박민우고요. 글을 쓰고, 세상을 떠도는 사람입니다. 식탐과 지질함을 자랑스러워하는 글쟁이입니다. 글광대라고도 해요. 자기소개를 하는 이유는, 가까워지고 싶어서죠. 만만하고, 편한 사람, 아는 사람의 글 한 줄이 더 와닿지 않겠어요? 조금씩만 스며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