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모와 치앙마이 한 달 살기 - 아버지 이러시깁니까?

by 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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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흡족해 하신 방)


"일어나자니까? 에이, 진짜!"


카페에서 아이스 카푸치노까지 맛나게 드시고, 왜 또 이러시는 걸까? 쉬고 싶다는 어머니를 끌고, 넓게 펼쳐진 카페 정원까지 탐색하셨다. 아버지의 반응으로 여행지를 평가한다면, Coffee in love는 만점에 가깝다. 아버지는 짐 하나를 번쩍 들더니 찻길로 나가신다. 숙소 체크인 시간은 오후 두 시. 그때까지 카페에서 노닥거릴 참이었다. 싫증이 나신 것이다. 급히 연락을 한다. 열두 시 체크인이 가능할까요? 네, 가능합니다.


"아버지, 택시 불렀어요. 택시 오면요. 그때 일어서요."


아버지는 짐 하나를 또 들더니, 길로 나가신다. 어머니와 나는 짐을 들고 따라나서야 했다. 도로에 짐을 쌓아두고는 언제 올지 모르는 택시를 무작정 기다린다.


"여보, 다른 사람 있을 때는 이어폰을 꽂고 혼자 들어요."


유튜브를 외부 스피커로 크게 듣는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상냥하게 이어폰을 꺼내셨다.


"안 들어, 안 들어."


지적을 받았으니, 음악 들을 기분이 아니시다. 말이 없어진 아버지는, 짐을 들고 벌떡 일어서셨다. 나이를 먹으면 아이가 된다. 주변이 보이지 않고, 자신만 보인다. 어른의 기억이 남은 아이다. 감히 아내가, 아들이 나를 지적해? 생각할수록 열 받네. 요상한 카페에서 좋다고 시시덕거리지 말고, 빨리 일어나라고. 일단 숙소로 가기로 했으면, 가자고. 가서 쉬든지, 다시 나오든지. 짐 쌓아놓고 커피가 목에 넘어가? 택시가 오면 바로 출발해야지. 그때 짐 들고 일어서게? 아버지를 얼마든지 해석할 수 있다. 다시는 네 아빠랑 여행 오나 봐라.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분통이 터지신다. 나는 어떤 아들이어야 하는가? 어떤 가이드여야 하는가? 빌어먹을 숙소는 외진 곳에 있다. 먼저 묵었던 집주인 카렌이 소개해준 곳이다. 일일이 알아본 다른 어떤 숙소보다 쌌다. 야시장이 있는 중심가는 방이 없거나, 성수기란 이유로 두세 배 방값이 폭등했다. 이번만은 정말이지 따로 자고 싶었다. 깊은 잠을 자고 싶다. 결국 돈 때문에 한 칸짜리 방으로 간다. 가장 외지고, 싼 방이다. 행복해지려고 온 여행이 맞나? 그럭저럭 온순한 하루가 아득하다.


반듯한 논밭이 바다처럼 펼쳐지고, 두터운 구름이 새파란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다. 좋은 방이 아니면 다 쓸모없다. 구글 평점은 4.2점. 1성급 호텔(Blue sky resort pai). 별 한 개 호텔이라! 그냥 여관이구나. 침울한 여관일 거야. 하아. 돈 때문에 이런 곳까지 기어들어 오다니. 시내에서 2km 거리지만, 걸어서는 밥집도, 시장도 없다. 하루 900밧. 3만 6천 원이 싼 건가? 한 달 삼십만 원을 벌기 위해 종일 청소를 하고, 농사를 짓는 태국 사람들이다. 숙소에 가까워질수록 두피가 가렵고, 혓바늘이 돋기 시작한다. 굉장히 작은 규모의 호텔이다. 잘 가꿔진 정원에 고작 방갈로 네 채라니. 이 숙소 사장은 본전을 뽑겠다는 걸까, 말겠다는 걸까?


우리가 묵을 곳은 입구에서 마지막 방갈로다. 신발을 벗고, 나무 계단을 오른다. 역시 나무로 된 정갈한 발코니가 눈에 들어온다. 미닫이 문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민다. 잡음 없이 깨끗이 열리고, 마룻바닥이 반짝인다. 눈이 부시는 맨질맨질함이다. 바닥이 미끄러워서 주의가 필요할 정도다. TV와 욕실, 딱히 특별할 건 없다. 시비 걸만한 구석도 없다.


-이런 방에 왔어야지. 이 방이 얼마라고? 이런 방은 십만 원을 줘도 안 아깝지.


아버지의 화가 단번에 누그러지는 방이다. 자그마한 나무 오두막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밝았고, 욕실은 넓었다. 카렌의 숙소는 훌륭했지만, 어머니, 아버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숙소였다. 이제야 나는 어머니, 아버지 불만에 동의한다. 밝은 조명을 싫어하는 서양인들은 실내를 부분 조명으로 끝낸다. 침침하다. 슬리퍼도 없는 시멘트 바닥은 차갑고, 기괴했다. 카렌은 자연을 강조하다 보니, 썩은 나무들도 그대로 놔뒀다. 욕실 안의 나무 기둥들은 아래부터 천천히 썩어가는 중이었다. 더러운 숙소는 아니지만, 쾌적함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문은 잘 안 잠겨서 막대기로 걸어둬야 고정이 됐다. 새 숙소에서 짐을 푸는데 엄지손가락만 한 바퀴벌레가 튀어나왔다. 카렌의 집에서 기어 들어온 바퀴벌레였다. 어머니는 그걸 휴지로 꾹, 엄청난 크기의 바퀴벌레를 한 번에 박멸하셨다. 나는 사실 좀 떨고 있었다. 밝고, 문명화된(딱딱한) 아파트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겐 불편하고, 난감한 숙소였다. 숙소만 달라졌을 뿐이다. 어머니, 아버지는 짐을 풀자마자 주변이 궁금하시다. 가지런히 펼쳐진 마늘밭으로 마실 나갈 준비를 하신다. 어차피 다 그게 그거. 이미 지긋지긋해하는 심술보 노인에게도, 여행은 적당한 충격과 반전을 준다. 여행의 자비로운 기운을 아버지는 아직 모르신다. 해치지 않고, 거부하지 않으며, 많은 걸 주고 싶은 하루들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줄타기는 계속된다. 무사히 벼랑 건너편에 도달하거나, 추락하거나. 줄타기가 묘미는, 아슬아슬함이다. 우리의 기쁨은 잠시 유지된다. 잠시일 것이다. 나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가올 충돌을 모르지 않는다. 정말 좋은 방이다. 아버지의 칭찬은 내게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어떤 날은 쓰고 싶지 않아요. 쓰죠. 쓰고나면 신기해요. 분명히 쓰기 싫었는데 말이죠. 살기 싫을 때, 이런 순간이 위로가 됩니다. 신기하네. 살아보니까, 살아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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