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아악, 아아아아악
1
-나는 안 나간다. 너나 엄마랑 먹고 와. 나는 죽 먹을 거니까.
어제저녁 아버지가 드시던 죽 절반이 냉장고에 있다. 그러지 좀 말고 같이 좀 나가요. 박민우 아버지 박상(자)원(자)학교 1학년 때라면, 이랬겠지. 이제 박상원 학교 박사학위를 준비 중이다. 다녀오겠습니다. 부릉, 오토바이 시동을 건다. 어머니가 내 허리를 꼭 감싼다. 다 큰 아들의 허리는 의외로 멀다. 어머니 젖무덤만 찾던 아이도 분명 나였다. 바들바들 떠는 어머니의 손이 이리 작았나 싶다. 어머니와 둘이 되면 어디를 가도, 뭐를 먹어도 좋다. 맛있다. 좋다. 감탄하시기 바쁘다. 나도 더 착해진다. 사진발 좀 받겠다 싶은 곳에서 멈추고, 어머니를 세운다. 활짝 웃어요. 입을 귀에 건다 생각하시고. 가장 예쁜 어머니 얼굴을 기다렸다, 찰칵! 이제는 아빠 떼놓고 올 거다. 네, 그러세요. 제발! 우린 한통속이 된다.
-아버지, 땅콩 좀 사가자.
한통속인 줄 알았던 어머니는, 평생의 반려자가 누구인지 잊지 않으셨다. 땅콩 좀 어디서 살 수 있는지 물어보라신다. 식당 주인은 건너편 가게를 가리킨다. 가게 문을 두드린다. 아무도 없다. 아직 문을 안 열었다.
-아무한테나 좀 더 물어봐.
50미터 앞쪽에 있는 고깃집을 가리키신다. 어머니는 물어봐, 좀 물어봐를 입에 달고 사신다. 가끔은 내가 자판기가 된 느낌이다. 어머니는 즉시 아무나 잡고 안 물어보는 내가 답답하시다. 한통속의 균열이 살짝 일어난다. 고깃집으로 간다.
-마트를 가세요. 2km 떨어져 있어요.
-아니, 무슨 땅콩 하나 사는 게 이렇게 힘들어? 우리 나라면 아무 시장이나 가도 있잖아.
이명(자)심(자) 학교 장학생인 박민우는, '우리나라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이명심 여사의 말들을 잽싸게 흘려듣는다. 어머니, 그 시장이 여기 없는 게 그리 안 당연한 일인가요? 그런 말까지 해서 득이 될 건 없다.
-타세요.
이왕 이렇게 된 거 2km 간다. 식사도 제대로 안 하신 아버지, 아들이 알아서 챙겼어야지. 식은 죽으로 한 끼를 때우시다니. 입 짧은 아버지가 선택한 몇 안 되는 간식, 그중 땅콩. 캐슈너트나 피스타치오도 아닌, 고작 땅콩이다.
-이리로 오세요.
경찰서 앞을 지난다. 검문 중이다. 설마? 이전 숙소 주인 카렌은 번호판도 없는 오토바이를 몬다. 검문은 일 년에 한 번 정도나 있을까 말까라고 했다. 오늘이 그 하루인가? 오토바이 세 대가 더 서 있다. 운전자들이 내려서 엉거주춤 경찰의 심문에 답을 하고 있다.
-국제면허증이 있나요?
없다. 그냥 운전면허증 자체가 없다. 어머니는 헬멧도 안 쓰셨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태국 사람들 덕에, 무면허 운전 중이었다. 드디어 정의의 심판을 받는 날이다. 400밧(16,000원) 벌금을 내고 풀려난다. 종이 쪼가리를 준다. 벌금을 냈으니 3일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더 운전해도 되는 종이 쪼가리다. 무면허 운전 마음껏 하셔요. 벌금만 조금 내시공. 더, 더 열심히 걷자. 벌금을 걷자.
-그냥 가, 땅콩은 무슨 땅콩이야.
어머니의 말씀에 화가 나는 이유는, 어머니의 후회가 너무 늦어서다. 사실 땅콩을 어서 찾아내라고 할 때, 불효자 박민우는 언짢아지기 시작했다. 16,000원 벌금까지 내고 집으로 가자고요? 이명심 여사는 박민우 학교 낙제생이시네. 옹졸한 박민우는 그 잘난 땅콩 꼭 찾아서 어머니 품에 안겨 드려야 한다.
-아니, 이런 땅콩 말고. 그냥 퍼서 파는 땅콩 있잖아.
소금으로 조미가 된 마트 땅콩을 보며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신다.
-그렇게 딱 맞는 것만 찾으시면 어떻게 해요? 어머니는 더 싼 땅콩을 찾으시는 거죠? 퍼서 파는 땅콩이 여기 없잖아요.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경동시장, 망원 시장 땅콩 사는 게 쉬운 줄 아세요?
-너는 또 왜 성질이야? 어미한테!
소금이 가미된 땅콩 두 봉지, 콩을 눌러서 튀긴 거 한 봉지를 샀다.
2
-그런데, 엄마 이거 물맛이 왜 이래요?
생수 맛이 이상하다.
-세제 맛이 나요.
-세제를 푼 물은 여기 따로 있어. 봐.
욕실 생수병에 담긴 세제물을 들어서 흔드신다. 어머니는 액체 세제를 물에 희석시켜서 빨래를 하신다. 똑같은 생수 병, 양만 조금 다르다.
-그런데, 왜 두 통에서 똑같은 냄새가 나요?
-아니라고. 아니라니까. 그래서? 이제 와서 뭐, 어쩔 건데?
-아아아아아아악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왔다. 세제를 마셨다. 물을 섞으셨네요? 즉사는 안 하겠네요. 감사합니다. 어머니! 니코틴, 타르가 몸에 해롭다고 해서 담배를 끊었다. 1급 발암물질 아질산나트륨이 들어갔다고 해서 스팸도 안 먹는다. 라면도, 커피 믹스도, 아이스크림도 몸 생각해서 한 달에 한 번 먹을까 말까다. 그랬더니, 그랬더니 계면활성제가 듬뿍 들어간 세제물을 마셨다. 어머니는 아니다. 어머니가 아니라니까, 아니다. 어떤 수상한 자가 세제를 물에 풀어 냉장고 맨 위칸에 넣어둔 것이다. 벌컥벌컥 정확히 세 모금, 아니, 네 모금을 들이켰다. 여기가 지옥이다.
-너, 이놈. 어머니가 아니래잖아.
-제가 괜찮냐고 먼저 물으셔야죠. 아, 진짜
오토바이 시동을 건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감싼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다. 아름다운 장면이다. 아버지는 어머니 없이는 못 사신다. 아들은 없어도 산다. 그 생생한 현장이다. 가족도, 여행도 지긋지긋하다.
-조심히 운전해, 천천히 가!
세제물을 마신 아들은 오토바이 시동을 건다. 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속으로 마음껏 소리를 지른다. 행복한 여행? 나는 이 허망하고, 아득한 욕망을 거둘 때가 됐다. 그런데 거둘 수가 없다. 아들 노릇, 가이드 노릇을 또 해야 한다. 토할 만큼 울렁대지도 않는다. 끄떡없이 세제를 소화해내는 내 몸뚱이도 지겹다. 거품 물고 대들었다. 세제 거품일까? 분노의 게거품일까? 잠시만 미쳐서 난동을 부릴 수 있는 코인 노래방이 어디 없을까? 아아악, 아아악. 오토바이 속도를 높인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제가 여러분의 여행이 되고 싶어요. 눈이 되고, 다리가 되어서 떠돌고 싶어요. 제가 그럴 수 없을 땐 여러분이 저의 눈이 되어주고, 다리가 되어 주실 거니까요. 즐거움도, 아픔도 나누는 글쟁이가 되고 싶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