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늙으세요. 따라서 늙겠습니다.
세제물을 먹은 후엔 어떤 커피가 좋을까? 이런 고민을 하면서 카페 메뉴판을 훑고 있는 날도 살다 보면 온다. 인공적인 꽃향기, 목구멍 아래에서 퐁퐁 솟아나고 있을 비누거품. 풍부한 우유 거품과 향긋한 계피향으로 지그시 눌러주고 싶다.
그래서 난 카푸치노. 뜨거운 걸로.
평소 깝치던 기생충들은 난리가 났겠구나. 봉사하고 싶고, 유익하고만 싶었던 유산균이라든지, 백혈구는 잘 살아봤자 아무 의미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죽어나가고 있을 것이다. 응급실에서 위세척을 하거나, 손가락이라도 집어넣어서 먹었던 걸 다 게워내야 마땅할 테지만 이미 창자 아래쯤 자리 잡고 있을 세제를 끄집어낼 방법은 없다. 내장에 들러붙어 지금까지 잘 살아온 온갖 생명체들아 잘 뒈지렴. 가는 길 꽃이 좋아? 거품이 좋아? 뽀송뽀송, 나도 못해본 버블 파티와 함께 뒈져 봐. 징징대지 말고, 깔끔하게 죽어, 죽엇!
Khaotha 카페는 두 번째다. 빠이(Pai)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라기에 왔고, 마셔 봤더니 맛있어서 또 왔다. 낮에 두세 시간 정도는 온전히 내 시간이다. 매일 쓰는 글이 약속이 되고, 생계를 책임져 주는 일이 됐다. 게다가 어머니, 아버지와 떨어져 있을 수 있다. 우유 거품이 유난히 두꺼운 카푸치노를 한 모금 마신다. 몽롱하다. 눈이 감긴다. 감는다. 이제야 온다. 세제야 와라. 이게 세제의 힘이구나. 너무 멀쩡해도 이상하지. 잠깐만 의식을 잃고 나면, 깔끔해진 내가 되겠지. 내일의 똥에선 다우니 냄새가 나게 해 줘.
잠깐 졸았을 뿐이다. 개운하다. 물에 탄 세제고, 물을 많이 탄 세제를 마셨을 뿐이다. 아무렇지도 않은데, 아무렇지도 않을 리 없다는 생각만 하니까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었던 몸이, 아무렇지 않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식은 카푸치노를 그러고 보니 마셔본 적이 없다. 너무 뜨거워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커피와 계피의 향이 한 가루, 한 가루 전해진다. 어머니는 냉장고에 세제를 넣을 수 없다는 말을 여러 번 하시고는, 문제의 세제물을 졸졸졸 변기에 따라 버리시겠지. 매일 나오는 빨래는 어머니 덕에 쌓일 틈이 없다. 땀냄새 옷을 이틀 입은 적이 없다. 장기 여행자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무 깨끗함에 목을 매면, 더럽고, 진실하고, 가난한 여행자들이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다(세제물을 마시고 나서 쓰는 첫 개소리입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걱정하신다. 늘 밝은 어머니를 아버지는 보고 싶다. 그래야 마음껏 투덜댈 수 있다. 단단한 균형의 바닥이 있다는 걸 알고, 아버지는 힘차게 투정의 텀블링을 즐기셨다. 여행은 없어도 되지만, 아내는 없으면 안 된다.
-조금만 있다가 들어갈게요.
어머니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이제 어머니도 안심하실 것이다. 화가 풀린 아들은 곧 돌아올 거니까. 몇 년 전부터 어머니 눈빛이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생기를 잃은 생선의 눈알을 어머니에게서 봤다. 연결된 뇌가 급격히 쪼그라들고 있구나. 치매가 남이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겁이 덜컥 났다. 스마트폰을 사서 안겨드렸다. 카톡을 하게 하고, 유튜브로 이미자의 노래를, 백종원의 요리를 스스로 찾으시도록 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늙어가는 뇌는 쥐어짜며 뭔가를 할 것이다. 이번 여행도 그런 이유로 시작됐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환경 속에 던져져서, 죽었던 뇌를 괴롭히는 시간. 한국어는 하나도 안 들린다. 문제가 있어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아들만 없으면 안절부절, 호텔 리셉션에 쭈뼛쭈뼛 걸어가서 물을 줘. 아니 워터, 워어터. 용기를 내서 한 발음, 한 발음. 천지가 진동하고, 뇌에서는 난리가 난다. 처음 보는 꽃, 나무, 향, 음식에 당혹스럽고, 황홀하다. 24시간 어머니, 아버지 병수발을 들 수 없는 불효자라서, 부모님 스스로가 노화와 뇌를 책임질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나의 미래다. 나의 노화다. 부모님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질 리 없다. 설마 내가? 내가 세제를 냉장고에 넣을 리가? 전자레인지로 플라스틱 용기를 다 녹일 리가? 그런 날은 온다. 반드시 온다. 여행은 어떻게든 살아남겠지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선 뭐든 해야 함을 알게 되는 과정이다. 소중한 막막함이 이 카페에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머무는 방에도 가득하다. 우린 곧 재회한다. 만나서 밥을 먹고, 함께 이부자리를 편다. 어떤 사람은 온통 막막하기만 한 하루이기도 한데, 우린 막막함도 있고, 여행도 있다. 불공평한 세상, 우린 밝은 쪽에 있다. 나는 이 커피를 마시고, 한 잔 더, 더 비싼 커피로 마실 생각이다. 믹스 커피만 마시는 부모님께 죄송하지만, 나는 내가 더 소중하다. 소중한 나는, 건강하게 툴툴 터는 법을 열심히 익힐 것이다. 너무 오래 가라앉지는 않을 생각이다. 오늘의 깨달음이 익어간다. Khaotha에서 마신 카푸치노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글로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는 중입니다. 그냥 세상이 아니라, 박민우가 있는 세상. 제 글을 읽는 이들에게 그런 세상이었으면 해요. 꿈이 좀 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