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아버지 아들이 오늘은 잘난 척 좀 하겠사옵니다
-반자보까지 가는 투어가 있나요?
-3천 밧(12만 원)만 줘요.
-그렇게까지 비싸요?
-그럼 새벽에 기사 딸린 차로 가는데, 십 밧(400원) 정도 하는 줄 알았어요?
사장이겠지? 여행사 직원이 벌러덩 누워서 TV 볼 배짱까진 없을 테니까. 빠이에서 최초로 만나는 무례한 사람이다. 부모님과 뭔가를 먹고, 뭔가를 보고, 매일 글을 완성한다. 단출한 일과지만 사이사이 어머니와 아버지, 아버지와 나, 어머니와 나 돌아가면서 싸우고, 세제물을 마시거나, 경찰에게 딱지를 떼인다. 그런 와중에도 빠이 사람들이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예를 들면 경찰서에서 무면허로 딱지를 뗄 때, 청년 경찰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벌금 400밧을 달라 했다.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그깟 무면허로 큰돈을 착취하다니요? 그런 표정으로 공손히 손을 내밀었다. 순한 사람들만 사는 줄 알았지. 저렇게 말을 싹퉁머리 없이 하는 직지도 사는 줄 몰랐다. 바로 옆옆 여행사에서 1,600밧에 반자보로 가는 차를 빌렸다.
이렇게 바쁜데 작가가 나를 찾아오기도 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글로 먹고사는 작가들이 존경하고, 쫓아다니고(아니라고 우기겠지만), 보고 싶어 한다. 여행작가계의 살아있는 전설, 신이나 다름없다(너무 진지한가? 어허 그렇다고 침을 뱉으시긴가요?). 사촌 누나 둘과 빠이에 온 젊은 작가는, 여기에 온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무슨 연예인인 줄 아나 봐. 이런저런 일정을 취소하고, 누나 둘과 태국에 왔다. 누나 둘이랑 빠이로 놀러가용. 이렇게 말하는 게 쉽지 않았겠지.
Good life Dacha라는 곳에서 보기로 했다. 지나치다 발견한 숙소 겸 식당인데, 마당에서 명상하는 이들을 우연히 봤다. 나나 되니까 이런 곳도 알지. 약간의 잘난 척이 가능한 장소였다. 각자의 오토바이를 숙소 앞에 세우고, 반갑게 악수를 하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 말 지지리도 안 듣게 생긴 서양인들이 마당에서 꿀렁꿀렁 웨이브를 타고 있었다. 똑같은 동작은 하나도 없다. 예전에 명상을 열심히 할 때, 비슷한 걸 한 적이 있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말고, 어떻게 해야 한다 규정도 짓지 말고, 그냥 흐름에 자기를 맡겨 보라. 그러면 동작이 나오고, 춤이 나온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새처럼 날갯짓을 하고, 지렁이처럼 꿈틀댔다. 나 깨달은 건가? 지렁이도 그런 지렁이가 없었다. 갤럭시 노트를 들고 꿀렁대는 서양인들을 찍었다. 허락도 없이 사진부터 찍는 한심한 인간으로 보일 테지만, 적극적인 야성의 작가로 보일 수도 있잖아? 알아서 반해주길 바라면서 폰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사진 촬영은 안 됩니다. 같이 춤을 추시지요.
오십대로 보이는 백인 남자가 나를 막았다.
-아니면 커피를 한 잔 할까요? 제가 가져올게요.
숙소 사장인 우크라이나 남자는 예의 바르게 나를 제지했다. Good life Dacha의 Dacha는 러시아어로 별장이란 뜻이다. 모든 쪽팔림이 블랙홀처럼 내게로만 기어들어왔다. 나는 확실히 경솔했다. 그래도 이 짧은 순간에 커피를 공짜로 받아냈다. 자신의 이름을 철저히 감춰 달라는 작가는, 열 살 이상 차이 나는 사촌 누나 둘과 치앙마이, 빠이, 방콕을 도는 중이다. 열 살 차이면 위태위태하구먼. 서로 다 까놓고 솔직해지지 않으면 불만만 쌓여요. 사촌 누나와 철천지 원수가 되는 것도 시간 문제라오. 조언해주는 척, 어머니, 아버지와 다니는 심란함을 일방적으로 나불댔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상담을 받고, 정신과 의사를 만나는구나. 들어만 주는데도 확 눈물이 날 것 같고, 마음껏 약해져서 실컷 주저앉고만 싶다. 가방에서 주섬주섬 자신의 책 한 권, 내 책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 한 권, 카드 한 장을 꺼낸다. 내 책에 글을 남겨달라는 거구나. 자신의 책을 읽어달라는 거구나. 그런데 카드는 또 뭐야?
-지금 읽어보셔도 되는데요. 작가님 어머님, 아버님께 드리는 글이에요. 작가님과 부모님의 여행이 얼마나 멋져 보이는지 몰라요.
내 존재가 미안해지는 그런 순수함이 이 작가에게 있다. 모든 작가는 자기를 쏟는다. 그걸 책이라고 한다. 거지 같은 글도, 작가는 쏟아서 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자신의 정신과 피와, 불면의 밤을 글이라는 놈이 당당히 요구한다. 고기가 갈리고, 압축되어 식용 비닐에 꾹꾹 담겨야 소시지인 것처럼, 일정한 압박 속에서 글이 된다. 심지어 좋은 글은, 더 꾹꾹 누르고, 괴롭혀야 한다. 좋은 글을 쓰는 작가다. 내가 알아주니까, 정말 좋은 작가다. 그런데 부모님께 드리는 카드는 또 뭐냐고? 너무 순수해서, 뜬금없다니까. 크리스마스도 348일 남은 시점에서 왜 알록달록 카드를 내가, 부모님께 드려야 하느냐 말이다. 우크라이나 사장 아저씨는 커피를 까맣게 잊고, 우리를 방치한다. 주인 양반의 입방정이 아니었다면, 당연히 커피를 시키려고 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묻기도 모호하다. 그래서 우린 그냥 나불대기만 한다. 이렇게 부드럽게 돈을 굳힐 때가 제일 행복하다. 아, 돈 굳었다.
-이거, 뭐야? 돈이냐?
아버지와 고스톱을 치던 어머니는 십 달러 종이 세 장을 내게 흔드신다. 미국 돈 삼십 달러. 알록달록 카드가 들어간 봉투에 동봉되어 있었다. 허참. 부모님 카드는 핑계였던 거야? 나만큼이나 가난한 데다가, 나보다 더 어린양반이 무슨 늙은 형님을 챙겨? 자기도 여행, 나도 여행. 빠듯한 거지 인생.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카드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열 번씩만 읽고 주무세요.
-박민우 작가 덕분에 수많은 청춘들이 배낭을 메고 웃었습니다. 이제는 어머님, 아버님 덕문에 우리의 부모님도 길을 나설 수 있습니다.
아오 눈물 날라고 해. 약해지지 말자. 더 악독해져서, 어머니, 아버지를 감시해야지. 어머니, 아버지 우리 잘 좀 합시다. 더 잘 다닙시다. 생각할수록 오싹하네. 재빨리 까 보지 않길 잘했지. 눈앞에서 봉투를 열었으면 어쩔 뻔했어? 돈을 어쨌든 받았을 거면서, 난처한 연기를 또 얼마나 열심히 했을까?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잠을 청한다. 잠이야 어서 오렴. 새벽 네 시반에 일어나서 반자보로 가야 한다. 뭉클함이 너무 오래간다. 다음번에 만나면 내가 밥도 사고, 술도 사야 하니까, 한참 후에나 봐야지.
어머니, 아버지. 우리의 여행이, 우리들의 여행, 또 다른 이들의 여행이 되고 있어요. 다시 가슴이 뛰네. 아이고, 이 입방정, 아니 생각 방정. 잠이야, 제발 오렴.
PS 매일 글을 씁니다. 삶은 두려운 것인가요? 즐거운 것인가요? 둘 다겠죠. 우린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존재고요. 불안함이 불길함은 아니겠지요? 불안함은 나누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저의 불안함이, 여러분에게 작은 위로였으면 해요. 글을 써요. 그래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