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곳에서 정신을 혼미하게 해 드릴 것
-OIA라는 호텔에 한 번 가보세요. 누나들이 좋아할 거예요.
사촌 누나와 빠이에 온 이 젊은 작가도 뭐라도 건져가야지. 아무 곳이나 추천할 사람인가? 내가? 가본 건 아니지만, 좋을 것이다. 사진과 후기만 봐도 답 나온다. OIA는 그리스 산토리니 북서쪽 절벽 마을이다. 그 마을을 흉내 낸 빠이의 호텔이다. 짧게 여행 온 이들에겐 화려한 곳이 먹힌다. 작가의 누나들이 손뼉 치며 좋아할 것이다. 빠이에서 마지막 날이다. 반자보의 일출로 빠이의 일정은 완전해졌다. 쌀국수 면발과 달걀노른자 같은 태양이 한 프레임에 걸린 사진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오백 명 이상이 좋아요를 눌렀다. 2등은 저만치 있어서 보이지도 않는 역대급 신기록이다.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게 됐다. 가만, 결말은 누가 정하는 거지? 내가 정한다. 이 여행의 신은 나다. 신은 결말을 정하는 게 아니라, 끝까지 채우는 존재다(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이 여행은 나로 인해 더 커질 수도 있고, 작아질 수도 있다. OIA를 가겠다. 젊고, 잘 생긴 작가에게 기증받은 삼십 달러를 쓰겠다. 그리스 섬마을을 어설프게 쫓아한 게 죄는 아니잖아? 아직도 어머니, 아버지를 몰라? 알록달록 하얀 집에, 역시 하얀 보트가 둥실둥실. 동화 같은, 궁전 같은 곳을 보면서도 하품을 하실까? 아들아, 사진 좀 어서어서 찍어라. 왜, 이리 굼뜨냐? 해 넘어간다. 그렇게 돌변한 어머니, 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은가?
-천장이 뭐야? 나무야? 이런 것도 호텔이라고!
나는 아버지를 너무도 모르는 아들이었다. 오토바이로 두 번을 왕복했다. 한 번에 한 분씩. 처음엔 어머니, 나중에 아버지를 태우고 왔다. 어머니는 아들아 예쁘지만, 비쌀 것 같다. 사진만 찍고 가면 안 되니? 마냥 좋아하고 싶지만, 주머니 가벼운 아들이 마음에 걸리신다. 뜬금없이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만찬이다. 아버지는 잠깐 오호 여기 좀 봐라. 놀라고, 기가 죽으신다. 몇 분만에 원래의 아버지로 돌아오신다. 그리스 산토리니 섬의 작은 항구 마을을 흉내 낸 OIA 호텔은 모든 직원이 선원 복장을 하고 있다. 천장을 나무판자로 덧댄 건, 작은 어촌 마을 선착장을 표현하고 싶어서다. 이십 대 친구들은 인생 사진 건졌다며 뿌잉뿌잉을 남발할 곳이다. 마침 산토리니를 꼭 닮은 뙤약볕이 호텔 수면을 내리쬐고 있었다.
-와, 아버지. 음식 값도 안 비싸요. 지금 우리가 주문한 거 다 해서 삼만 원이 안 돼요.
-싼 것만 시켰으니까, 그렇지.
아버지. 아버지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반남박씨, 호남 최고의 가문이라면서요? 조선시대, 아니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를 누가 썼나요? 연암 박지원 할아버지라면서요? 직계 할아버지도 아니면서, 우리 집, 우리 할아버지처럼 자랑하고 다니시잖아요. 박지원 할아버지 책을 그리 많이 사서, 꽂아 놓으면 뭐해요? 왜 읽지를 않으세요? 화통하고, 호기심 많고, 장난기 가득한 박지원 할아버지의 흥을 왜 모르시나요? 그냥 유명하니까, 그저 자랑스러우신 건가요? 다른 세상, 앞선 세상, 거대한 세상을 제대로 감동한 사람이 바로 박지원 할아버지라고요. 아들이 얄미우세요? 여행이 싫으신 건가요? 대충 드시고 어서 갑시다. 이깟 유치한 밥 한 끼에 제가 너무 흥분했어요. 알겠습니다. 엄한 데 돈 쓴 게 싫으신 거죠? 친구들한테 자랑을 할 사진은 두둑 찍어놓으셨으니, 일부러 딴지 한 번 걸어보시는 거죠? 그래요. 제 기대만큼 좋아해 달라는 저도, 일종의 꼰대죠. 일어나요.
-우리 숙소가 빠이 안쪽으로 들어가요. 호텔 차로 좀 태워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어머니, 아버지를 또 태워드릴 마음이 나겠어요? 뭐가 예뻐서요? 왜 아쉬운 소리를 하냐면요. 저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 뻗는 사람입니다. 손님은 우리뿐인데, 손님 실어 나르는 차량이 여러 대 놀고 있더라고요. 밥 먹는 손님을 위한 차가 아닌 건 알아요. 물어나 보는 거죠. 저나 되니까, 이런 빈틈도 보는 겁니다. 훌륭한 아들 덕에 여행 편하게 하는 거, 알아달라고 안 합니다. 네, 일어나세요. 답을 듣고나 가세요. 안 태워주면, 미워도 우리 어머니 아버지, 누가 태우겠어요? 제가 입 삐쭉 내밀고, 모시고 갑니다. 걱정 마세요. 안 도망갑니다.
-예스, 예스. 엄마, 아빠 레츠고!
잘못 들은 거 아니고요. 한국어로 엄마, 아빠라고 한 거 맞아요. 빠이에서 늦둥이까지 보셨어요. 이 복을 다 어찌 감당하시렵니까?
-아니, 이게 말이 되냐? 한참 바쁜 점심시간에, 공짜로 태워주는 경우가 어디 있어? 한국이라면 어림도 없지. 우리 태워주고 욕먹는 거 아니냐? 너도 그렇지. 염치가 좀 있어야지. 얘가 잘리면, 네가 책임질 거야? 여기 숙소 명함 좀 달라고 해. 연락처도 받아 놔. 아니, 어떻게 밥만 먹고 가는데, 집까지 태워줘? 나는 이런 곳은 처음 봤다. 이런 나라는 처음 봤어.
아이고, 아버지. 그냥 좋다고 하세요. 그래도 누가 안 잡아 가요. 그렇게 삐져나오는 웃음 안 참으셔도 돼요. 엄마, 아빠를 모시고 가는 운전사가 창 밖으로 손을 흔드네요. 나는 어머니, 아버지를 쫓아요. 박상원, 이명심 부부는 유치원 아이처럼 고와졌네요. 삼양동 사거리 주산부인과에서 태어난 아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열심히 쫓고 있으니까요. 맞게 가고 있는 건지,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들이 또 여행 가자고 안 하면 어쩌지? 그게 걱정이면 좀 더 착해지셔야죠. 이제 여행 맛에 눈뜬 아버지는, 저한테 큰 약점 잡히신 거예요. 큰일 났어요. 둘째 아들한테 평생 지고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 그래야 또 태국에 오고, 빠이에 오고, 늦둥이 아들과 재회도 하죠. 하하하. 제가 오늘은 이겼습니다. 아버지! 눈 크게 뜨고 펼쳐진 마늘밭을 보세요. 왜 자꾸 눈을 감으세요? 우리만을 위한 꽃들이, 풀들이 이렇게나 흔들리고 있는데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저는 글만 쓰는데도, 보세요. 이렇게 만나잖아요. 여기서요. 신비로워요. 저는 누구보다도 그게 신비로워요. 저에게 신비로움을 주셨어요. 자주 오셔서, 저 좀 흥나게 해 주세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