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여전히 잘 생겼다. 안 늙네, 안 늙어. 너는 필러를 좀 맞든가 해야지.
이십 대 때는 동안 소리가 그렇게 싫더니, 이제 오십 대 남자보다 더 늙어 보인다는 사실을 굳이, 어머니의 입을 통해 듣는다. 이번만큼은 내 몰골이나, 질투심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땅 형님의 떡대 주위로 광채가 눈부시다. 아, 이런 느낌인가? 구원이나 신의 은총 느낌이? 방콕에서 비행기를 타고 치앙마이 공항에 도착한 형님은, 렌트한 차로 우리의 짐을 싣는다. 친구 부모님을 즐겁게 해 드리려고, 비행기 값, 자동차 렌트비로만 최소 오십만 원을 썼다. 내 친구, 친구의 친구, 친척 수십 명이 땅 형님의 은혜로 방콕 맛집에서 배 터지게 먹었다. 서울에 오면 꼭 모시겠습니다. 번호표 받고 땅 형님을 영접하고픈 이들이 서울에만 열 명이 넘는다. 대부분은 그 소원을 이룰 수 없다. 땅 형님은 한국에 와도, 숙소 근처에서 깨작깨작 작은 맛집만 다니고는, 방콕으로 돌아간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숙소까지 자기 돈으로 예약하겠다고 해서, 서둘러 예약했다. 맨날 빌어먹는다고,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난, 그냥 따로 방 잡으면 안 돼? 화장실이 하나일 거 아니야?
-두 개 있는 방이거든요.
따로 자겠다니? 형님, 아니 형씨!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콧바람 쐬러 온 거 아닙니다만. 철저히 우리 아버지를 책임지셔야 할 분이, 딴 곳에서 묵겠다고요? 돈은 돈대로 쓰고, 욕받이 하고 싶어요? 며칠 있다 가냐? 몇 시 비행기냐? 이별할 날부터 걱정합니다. 아버지가요. 제발 우리 아버지 사랑 다 받고, 그 사랑에 대한 답으로, 손 꼭 잡고 다녀 주세요. 땡 빚을 지더라도, 화장실 두 개 방은 구합니다. 입이 떡 벌어지는 방으로 구해놓을 테니, 몸만 와서, 얌전히 자고 가요.
화장실이 두 개인 방이라!
평균적인 태국 집은 작다. 저택을 빌려야 하나? 태국 물가가 아무리 저렴해도, 그런 집을 통째로 빌리려면 1박에 이십만 원은 써야 한다. 그럴 돈이 있을 리 없다. 있어도 못 쓴다. 눈에 불을 켜고 에어비엔비를 뒤졌다. 영업개시를 한지 얼마 안 되는 이들이 헐값에 방을 내놓는다. 입소문이 나고 안정궤도에 오르면, 방값은 얼마든지 올려 받을 수 있다. 욕조까지 있는 방 두 개짜리를 찾았다. 화장실이 두 개인 것도 확인했다. 그래서 가격은? 1박에 얼마냐고? 사만 원이다. 사십만 원이 아니고? 다시 확인했다. 1박에 4만 원 맞다. 죽으라는 법은 없다. 악취가 나거나, 공동묘지가 창밖으로 으스스하게 펼쳐져 있는 아파트겠지. 4만 원이면 공동묘지도 보이고, 장롱 안에 처키 인형도 낄낄대고 해야지. 형님, 어머니, 아버지 욕은 다 내게 해주세요. 1박에 십만 원 이상은 쓸 수 없으니, 욕먹고 말겠습니다. 아니 5만 원도 못 쓰겠습니다. 욕먹을게요. 저도 은근히 모질고, 둔하더군요. 예민하기만 한 건 아니었어요.
아버지이이이! 말이 안 통하면, 몇 마디만 하고 마셔야죠. 그래, 땅이 어머님은 잘 계시고? 살이 좀 빠졌네. 그동안 잘 지냈어? 어머님 계시는 곳은 멀어? 직접 찾아뵐 수 있을까? 몇 시간 걸린다고? 자고 안 와도 돼. 가고 싶어. 땅이네 집, 땅이네 농장. 안 피곤하십니까? 아버지. 저는 또 열심히 통역을 하고, 착한 땅 형님은 일일이 답을 다 하고. 운전 사고가 이러니까 나는 거구나. 두 시간도 못 자고 온 사람 영혼은 이미 가출했다.
20분 만에 작은 독채 아파트에 도착했다. 태국 사람들은 콘도라고 부른다. 콘도미니엄의 준말이다. 우편함에 있는 열쇠 꾸러미를 찾아낸다. 키 카드로 건물 입구 문을 연다. 1박에 6만 원 정도가 어울리는 로비다. 치앙마이 야시장에서 가깝다. 꽤 괜찮은 위치다. 위치까지 괜찮다는 건 방이 형편없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방문을 열면 국적 불명의 변기 냄새가 훅 들어올 것이다. 창문을 열면 풍경은 없고, 옆 건물의 벽, 그 벽의 덕지덕지 페인트칠만 보일 것이다. 괜찮네. 그런 방은 한 달 전에 동이 난다. 치앙마이의 1월은 성수기다. 아무 흠이 없는 방은 내가 예약할 수 있는 방이 아니다. 화장실 두 개, 4만 원. 두 개만 보고, 그냥 결제했다. 후기도 안 봤다. 번복할 수 없으면, 일방적으로 사랑하면 된다.
8층 건물, 7층 방이다. 열쇠로 문을 열고, 키 카드를 꼽는다. 불을 켠다. 주방 겸 응접실은 작다. 화장실 두 개가 있을 크기가 아닌데? 원룸 아니야? 그럼 그렇지. 일단 실망한다. 악취는 없다. 그거면 됐다. 일단 오른쪽 방부터. 큼직한 침대, 욕조, 베란다. 베란다 밖으로는 태국 특유의 낮은 집들과 아가자기하게 녹지가 섞여 있다. 끝내주는 전망이 아닐 뿐이지, 커피 한 잔 놓고 책 몇 페이지 넘기고픈 풍경이다. 한쪽 벽에는 벽걸이형 TV가 있다. 가만, 거실에도 분명 TV가 있었다. 전자레인지, 토스트기 등등 필요한 주방 기기들도 모두 갖추고 있다. 뭐지? 집주인이 미친 건가? 4만 원에 두 개의 벽걸이 TV라니. 어머니는 이제 매일 반신욕을 하실 수 있다. 왼쪽 방은 더 작겠지? 방 크기가 같다. 침대가, 침대가 더, 더 크다. 엄청난 크기다. 성인 남자 둘이 아무리 뒹굴어도 팔꿈치 하나 닿을 수 없다.
-10만 원은 줬겠구먼.
내가 얼마나 대단한 방을 찾아냈는지, 아버지의 입을 통해 확인했다. 같은 크기 벽걸이 TV가 늠름하게 매달려 있다. 4만 원에 세 대의 벽걸이 TV, 한 개의 욕조, 두 개의 화장실, 여성용 화장대, 나이트 바자가 코앞인 위치.
-11만 원 줬어요.
이렇게 말하고, 나는 땅 형님을, 아버지를, 어머니를 한 번씩 봤다.
-그렇게 돈을 펑펑 쓰면 어쩌냐?
아버지는 누그러져서는, 돈걱정을 하셨다. 이렇게 11만 원 방을 잡은 아들이 됐다. 한식 먹으러 갑시다. 거짓말로 번 7만 원 탕진하러 가는 겁니다. 아무리 먹어도 7만 원 쓰기 쉽지 않으니까요. 방콕에서 제일 맛있는 한식집으로 가요. 오늘 아들이 이상하게 당당하고, 이상하게 목소리가 커도 그냥 그러려니 하시고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아주 작은 기다림 혹은 재미면 족합니다. 너무 대단하지 않게 천천히, 남고 싶습니다. 사소하게, 그럭저럭
이곳이 문제의 에어비엔비 방. 아시죠? 에어비엔비는 방값이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거. 더 비싸져도, 전 책임 못 집니다. 더 비싸도 되는 방이기도 하고요. 출입 열쇠가 하나인 게 좀 불만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