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물이 공짜인 나라보다, 공짜가 아닌 나라가 더 많아요. 물을 안 준다고 발끈하실 게 아니라, 물을 공짜로 주면 고마워하셔야 해요. 안 주면 그런가 보다 하세요.
물을 왜 사 마셔야 하냐며 화를 내시는 아버지를 첫날 겨우겨우 진정시켰다.
생수병에 담긴 물이 공짜인 나라는 없다. 정수된 물은 주는 곳도 있고, 안 주는 곳도 있다. 괜찮은 식당일수록 물 인심 야박하다. 미네랄워터라고 메뉴판에 또박또박 찍힌 물을 주문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물 인심이 가장 후한 나라다. 웅진 코웨이, 청호 나이스 정수기가 큰 공을 세웠다.
-왜, 여기 물은 공짜가 아니냐?
마당이란 한식집이었다. 지난번 먹었던 마당2는 공짜로 물을 줬다. 원조집이 물 가지고 장난을 쳐? 아버지의 분노는 부당하기만 한 건 아니다.
-이리 좀 와 보쇼. 여기는 왜 물이 공짜가 아니요? 저번에 먹은 곳은 공짜였소.
-아, 아버지. 그 사람 한국 사람 아니에요.
-한국 사람이 사장인데, 일하는 사람이 태국 사람인 걸 내가 일일이 어떻게 알아?
국물 떡볶이, 고등어구이, 된장찌개, 모둠전을 시켰다. 잔칫날이 따로 없는 밥상이다. 즐거움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누군가는 확실히 소홀히 하고 있다.
첫 번째, 아버지는 아버지의 상식이 무너지는 걸 원하지 않으신다. 세상이 아버지 상식대로 움직여야 한다.
두 번째,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에 대한 논리와 분석이 매우 독특하시다. 한국 사람이 하는 식당은, 한국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게 태국이라고, 태국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태국 사람이 한국 식당에서 일하는 게 이상한 것이다.
세 번째, 어떤 손해든 발끈하지 않으면,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없다. 바보 천치들이나 물을 사 마신다.
매일 새로운 아버지를 만난다. 몰랐다. TV 뉴스를 시청할 때, 드라마를 볼 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며 살았다. 같은 한국말을 하고, 한 집에서 누구보다 오래 살았지만, 내 주변 어떤 인물보다 신선하다. 그리고, 솔직히 좀 창피하다.
아니, 아버지. 왜 그러세요? 목소리를 꾹꾹 눌러가며, 아버지를 달랜다. 솔직히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망신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어려워하는 큰아버지가 등장해서는, 너는 왜 어릴 때나, 지금이나 설치냐? 아버지보다 큰 목소리로 쩌렁쩌렁 혼내는 모습을 보고 싶다. 상상이지만, 그런 상상은 짜릿하기만 하다. 가학의 즐거움은 일종의 정신병이다. 나도 정상적인 즐거움만 좇고 싶다. 지금 내겐 정상적인 마음가짐은 멀다. 어디까지나 내 입장일 뿐이다. 아버지도 나처럼 글을 업으로 삼으셨다면, 아들놈의 무례함, 잘난 척, 지적질에 대해 길게 길게 써 내려가셨을 것이다. 일방적으로 아버지만 매도당하는 참 불공정한 글을 매일 쓴다. 아버지의 세상이 좁고 답답하다는 생각을 한다. 아버지에겐 이 여행이 감옥일까? 일종의 폭력일까? 아버지의 자유는, 여행으로 쪼그라들고 있는 걸까? 아버지의 도발은 늘 난감하고, 흥미롭다. 여전히 아버지가 기쁨에 겨워하는 장면을 그린다. 나는 그런 장면을 꼭 보고 싶다.
가능할 것이다. 여행의 힘을 믿는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어떤 분이 어제 '정말 한국 분위기 모르시네요' 이런 댓글을 달았더군요. 코로나 바이러스로 난리인데, 팔자 좋게 여행 이야기나 처하고 있다는 얘기겠지요. 지난 여행기를 올리고 있어요. 답답한 방에서, 어두운 뉴스에 지친 분들에게 작은 위로와 숨통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