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사기꾼이지만 혹시 아닐 것 같은 인간이 저를 괴롭힙니다
* 2월에 이미 다녀온 달랏 이야기입니다. 누군가가 제게 65억을 상속해 주겠다는 메일을 매일 보내던 시간이기도 했죠. 코로나가 어서 빨리 끝나서, 모두의 여행이 자유로워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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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Manuel Kilkenny)
MSK Law Firm
메일을 받자마자, MSK 로펌을 검색했다. LA와 뉴욕에 규모가 있어 보이는 로펌이었다. 변호사 마누엘을 검색해 봤는데, 마누엘 변호사는 어쩐 일인지 검색이 안됐다. 게으른 미국 놈들은 우리 마누엘 변호사를 찬밥 취급하고 있다. 몹시 서두르고 있다. 그만큼 도리스 여사가 위중하다. 그녀는 변호사를 다그치고 있다. 살아서 보고 싶은 것이다. 65억이 박민우 통장에 무사히 채워지는 걸. 알려달라는 정보는, 부담 없는 것들 뿐이다. 통장 번호 정도는 처음부터 물어봐도 될 텐데. 얼른 가르쳐 줬을 텐데. 왜 일을 두 번씩 하려고 드는지. 효율성으로 볼 때, 미국은 빵점 짜리 나라다. 자기가 번 돈, 누군가에게 주는 것조차 이리 성가시다. LA와 뉴욕에 있는 어엿한 로펌이다. 65억의 악어가 아가리를 벌리고 나를 삼키려 한다. 나는 삼켜질 것이다. 0의 가치, 비움의 자유로움은 이제 남 이야기다. 과거의 나는 가난해서 가난을 변호했다. 65억이 생기면, 모든 사람의 손가락질을 달게 받겠다. 거짓말쟁이 변절자는 깊이 반성하고, 돈만 악착같이 챙기겠다. 욕먹는 부자가 얼마나 괴로운지, 이참에 뼈저리게 느껴보겠다. 방이 좀 춥다. 침낭을 꺼낸다. 오늘 뭘 했더라? 정말 예쁜 카페를 봤지. 운이 좋았다. 물 위에 떠 있는 방이라니. 베트남이 이렇게 세련된 나라였나? 달랏만 그런 걸까? 내가 묵는 방을 봐. 단단하고, 적당히 폭신한 매트리스, 꼭 필요한 수납 선반. 프랑스였다면 십오만 원은 족히 줘야 하는 방이다. 이만 오천 원에, 이런 방이라니.사기꾼과 바가지에 진저리를 쳤던 십 년 전 베트남이 아니다. 개돼지보다 못한 베트남 놈들. 나의 저주는, 이제 나의 부끄러움이 됐다. 변화를 읽지 못하고, 발전과 성장의 가능성을 외면했다. 이토록 어리석으니, 이젠 돈방석의 괴로움에 몸서리를 쳐야 한다. 뭘 먹어도 다 맛이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저주에 허우적대야 한다. 그때가 좋았지. 없을 때가 행복했어. 뻔한 깨우침에 다다르기 위해, 돈다발에 깔려봐야 한다. 이제 운명은 나의 여행을 말리고 있다. 매일 써봤자 돈도 안 되는 글도 그만. 돈이 있어도 나는 변하지 않을 거야. 그따위 장담을 왜 해? 나는 다짐합니다. 절대로 달라지겠습니다. 배가 부르면 토하고, 배가 고프면 먹는 게 인간입니다.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게 자연입니다. 아름다움입니다.
in other to
신속한 업무 처리를 위해, 빠른 답 부탁드립니다. ~~ 위해. in order to를 헷갈리는 변호사도 있나? 두 번 읽을 때까지도 안 보였다. 세 번째는 보였다. order와 other.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철자 한두 개가 틀린 게 아니다. 그냥 order가 other인 줄 안 것이다. 이런 개새끼이이이, 마누엘이란 이름이 어쩐지 없더라니. 제법 큰 로펌 하나를 검색해서는, 변호사 행세를 하시겠다? 서류 양식도 없이, 글만 깨작깨작 보내고는 변호사? 로펌? 뭘 털어먹을 게 있다고, 가난한 여행작가한테 공을 들이는 거냐? 이 사기꾼 팀에, 한국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건가? 매일 내 궁상을 구구절절 쓰는데, 그건 아예 안 읽은 건가? 도리스 여사는 엄연히 브런치 회원이고, 팔로우하는 작가가 40명이 넘는다. 흰 머리가 고운, 한국 할머니가 프로필 사진이다. 브런치는 한글을 모르는 이라면 가입할 이유가 전혀 없다. 내 것일 리가 없는 65억이, 확실히 아닌 게 되었다.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외계인을 봐도 놀라지 않을 자신 있다. 내일 당장 달나라에 보내주겠습니다. 미국 NASA에서 연락이 오면, 당장 짐 쌀 용의가 있다(단, 확실히 살려서 지구에 데려다 놔야 한다). 그런 내가 그깟 65억에 눈 하나 깜짝할까 봐? 분당 이매역 역세권 아파트는 왜 검색했냐면, 더 오르기 전에 사두고 싶어서다. 어머니, 아버지 더 나이 들기 전에 편한 곳에서 모시고 싶었다. 돈도 없으면서 왜 검색했냐고? 돈이 없으니까, 검색만 하지. 돈 있으면, 중개업소에 두 발로 찾아 진즉에 찾아갔다. 나는 결코 휘둘리지 않았다. 부자와 거지를 하루에 열두 번도 오가는 게 하나도 안 괴롭다. 이 개새끼들이 내게 원하는 게 뭘까? 궁금하고, 무섭고, 또 약간은 미련이 남는다. 마누엘이 in other to만 실수하는, 멍청이 변호사이기를 바란다.
-First Bank 은행장 Mr. Gregory Mbuyane
몇 시간 후에 은행장님께서 친히 내게 이메일을 주셨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언젠가 내 글을 읽은 사람들과 동시에 다 만나는 꿈을 꿔요.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어마어마한 인파가 저를 기억하죠. 꿈이잖아요. 꿈은 커야죠. 상상만 해도 뭉클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