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로 오세요. 등신 작가님

사기꾼이 진짜로 원하는 건 납치였다

by 박민우

2월에 다녀온 여행기입니다. 어서 빨리 코로나가 진정되고, 여행이 자유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랍니다.

20200129_151015.jpg 이렇게 아름다운 달랏에서 왜 나는 사기꾼과 피곤한 잔머리 싸움을 해야 하는 걸까?

-도리스 여사의 마지막 유언은 MSK 로펌, 변호사 마누엘의 공증 하에 법원에서 모든 절차를 마쳤습니다. 유산은 새롭게 개설된 박민우 계좌로 이체되었습니다. 필요한 몇 가지 서류가 남았습니다. ATM 카드는 현재 마누엘 변호사에게 있습니다. 적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나머지 서류를 준비해 주십시오. 이 메일은 7일 간만 유효합니다. 이메일을 받는 즉시, 마누엘 변호사에게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Mr. Gregory Mbuyane,

Chief Operating Officer,

First National Bank Ltd, South Africa.

영어로 된 메일이었다. 구글 번역기를 돌린 초딩 수준의 한글이 자막처럼 깔려 있었다. 위의 내용은 내가 약간 손 본 것이다. 자, 65억은 이미 내 것이 됐다. 훨씬 더 지난한 과정을 각오했다. 65억을 수령하려면 비행기까지 탈 생각이었다. 도리스 할머니부터 찾아봬야지. 너무 늦으면 안 되는데. 무덤에서 펑펑 우는 상상도 했다. 아니, 제가 뭐라고 그런 큰돈을 주셨나요? 알겠습니다. 그 믿음 평생 빚입니다. 베풀며 살겠습니다. 헛되이 쓰면 안 된다. 미리 나를 여러 번 다잡았다. 도리스 할머니는 얼마나 마음이 급했던 걸까? 65억 카드는 어떻게 받아야 하나?

(삼엄한 경비 속에 무사히 전달되기 위해, 특별 보안 팀이 필요합니다. 소요금액은 이백만 원 정도입니다. 이 액수는 수취인이 부담해야 합니다. 상속법, 금융법을 준수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어쩔 수 없는 점 이해 바랍니다.)

너네는 이런 이야기 아직 안 꺼냈다만, 다 보인다. 내가 너네 머리 꼭대기에 있단다. 대가리를 남의 돈 뜯어먹는 데만 쓰는 것들아.

65억 현금 카드가 내 이름으로 발행됐다는 부분에서 나는 급격히 차분해졌다. 일주일만 유효하다는 말에선 웃기기까지 했다. 마지막 줄의 South Africa가 눈에 들어왔다. 도리스 할머니는 미국 할머니라고 생각했다. 큰돈을 가진 교포면, 당연히 미국 할머니지. 국적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미국 사람이라고 내내 생각했다. 간호사 산드라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줄루족이라 영어가 서툴다는 내용을 기억한다. 별의별 사람이 모이는 미국이다. 이민자인가 보지. 그러고 말았다. 이 모든 일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시작됐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아무런 악감정 없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시작됐으니, 사기임이 더 분명해졌다. 변호사에, 은행장까지 들먹이며 참 열심히구나. 계정을 파서 브런치에 가입하고, 글을 쓰는 이들을 열심히 팔로우하고, 먹잇감을 찾다니. 한국 사람도 아니면서, 외국말로 도배된 곳에서, 돈줄이 될 만한 외국인(그러니까 한국인)을 고르고, 고른 건가? 내 상상대로 카드 운송비 정도를 채가려고 이렇게까지 심혈을 기울인 거야? 한두 달에 걸쳐서 천천히? 집요하게?

남아프리카 공화국, 한국, 사기

세 단어를 넣어서 뉴스를 검색해 본다. 투자를 약속하고 한국인을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불러들인 2015년 사건이 우선 뜬다. 경찰복을 입은 가짜 경찰까지 등장해 경찰료, 송금료 등으로 이천 육백만 원을 가로챈 뉴스였다. 원하는 돈이 안 나오자 납치, 감금까지 했다. 무법 천지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선 피싱 메일을 통해 살인 사건까지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며 끝을 맺었다. 나를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불러들이려고 했었구나. 가난한 글쟁이인 건 중요치 않다. 감금하고, 협박하면 가족을 끌어들여서라도 몇천만 원은 쥐어짤 수 있다. 조금만 더 멍청했다면, 아프리카의 지하 어딘가에 갇혀서, 던져주는 빵 쪼가리에 연명하며, 몇 천만 원을 바칠 뻔했다. 꽃의 도시 달랏이 케이프 타운의 한적한 주택가가 된다. 어머니, 농협 통장에 있는 돈요. 다 보내세요. 한 푼도 남기지 말고요. 아들이 죽어요. 그걸 왜 못해요? 경우형(사촌)한테 당장 전화하세요. 씨티은행에서 일하니까 국제 송금 잘 알 거예요. 울지 마시고요. 아들 안 죽어요.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농협으로 달려가세요. 어머니, 제발요. 살겠다는 마음만 짐승처럼 남아서, 국제 전화로 울부짖는 내 모습이 보인다. 한 놈만 걸려라. 이 끔찍하게 우아한 개자식들은 그 먼 땅으로 글쟁이를 끌어들이려 했다. 혹시 내 방도 감시되는 건가? 방이 춥다. 벌벌벌 떨린다. 노트북을 열었다.


-친애하는 산드라.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요. 저의 가장 친한 친구 친형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경찰이에요. 도리스 여사 이야기를 하니까 꼭 한 번 보고 싶다네요. 저는 아니라고 하는데도, 산드라 당신이 사기꾼이라는 거예요 오해 말아요. 제가 당신을 오해할 리가요. 단지 저는 작은 선물을 전달하고 싶어요. 친구 형이 전달해 줄 거예요. 알아요. 위중한 환자는 면회가 불가능하겠죠. 그냥 산드라가 제가 전한 선물을 받아 주면 돼요. 당신이 사기꾼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게 돼서 기뻐요. 그러니까 기쁜 소석이 아니고 뭐겠어요?

이메일을 보내고, 오토바이 시동을 걸었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글을 쓸 때만큼은 제가 열심히 살아요. 그 느낌이 좋습니다. 힘들게 땀 빼고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실 때처럼요. 그 짜릿함이 제가 제게 주는 선물입니다. 손가락이 고생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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