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최대 규모의 카페, 메린 커피농장(베트남 달랏)

카페는 아름답고, 커피는 맛있고, 나는 심난하고

by 박민우

2월에 다녀온 베트남 달랏 이야기입니다. 이전 에피소드를 읽으시면, 내용 중에 등장하는 편지 내용이 좀 더 쉬울 거예요.


20200201_165006.jpg


메린 커피 농장(Melinh coffee garden dalat)은 달랏 시내에서 자동차로 34분 거리. 오토바이로 한 시간을 넘기며 천천히 가고 있다. 끼익, 비포장 도로에서 브레이크를 잡았다. 하필 모래가 흩뿌려진 곳이어서 바퀴가 밀린다. 태국 치앙마이에서 빠이로 넘어갈 때 이런 길에서 오토바이와 함께 미끄러졌다. 아스팔트에 오른쪽 어깨와 다리를 모두 쓸리면서, 피를 철철 흘렸다. 날파리들이 모래가 박힌 어깨와 종아리로 우수수 달려들었다. 헬멧을 쓰지 않았다면, 얼굴까지 피투성이었을 것이다. 헬멧의 위력을 실감한 사고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느릿느릿 간다. 뒤에서 빵빵거리든 말든, 나만 무사하면 된다.

주문만 받는 부스가 네 개. 메린 커피 농장은 커피를 내리는 방이 아예 따로 있다. 바리스타도 여러 명. 족제비 똥, 위즐 커피가 유명하다. 구만 오천 동. 한 잔에 4천 원이 넘는 걸 보니 족제비 똥 커피겠지. 메뉴판 맨 윗줄에 있는 카피를 골랐다. 정성을 다해 고를 기분이 아니다. 내 커피를 든 남자가 나를 따라온다. 호수가 보이는 곳에 앉는다. 내 앞에 커피가 놓인다. 호수와 호수를 둘러싼 커피나무, 내가 주문한 베트남 커피가 순서대로 보인다. 골조에 지붕만 얹은 건물이 기차처럼 이어져 있다. 한 칸, 두 칸, 세 칸. 끝까지 못 세겠다. 커피농장을 감싼 기다란 공간이 끝도 없다. 이렇게 거대한 카페는 처음이다. 우아하고, 감동적이다. 베트남이 좋아 봤자지. 무시했다. 방콕, 치앙마이에서 대단한 카페를 너무 많이 보기도 했다. 65억 감옥에 갇혀서 생각만 많아지는 게 싫었다. 그래서 뛰쳐나왔다. 이런 어마어마한 카페에 감탄하기엔 내 안엔 내가 너무도 많다.

내게 65억이 생긴다면? 이백만 원을 써서 파티를 열려고 했다. 65억에서 이백만 원 말고, 그냥 내 돈 이백만 원. 65억이 있는데, 뭐가 두렵겠어? 독자 백 명을 초대해서 맛있는 걸 대접하고 싶었다. 솜씨가 남다른 유경이가 두 팔 걷어붙이고 으쌰으쌰하면 호사스러운 만찬이 될 것이다. 아슬아슬, 빈곤한 박 작가 말고, 한 턱 거하게 쏘는 씩씩한 박 작가가 하루쯤 되고 싶었다. 종일 먹고, 퍼마시다가 흠뻑 취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일확천금의 상상 속에 가끔씩 허우적댔다. 악당 개새끼들이 혼비백산 당황하기를 바란다. 전화기만 달랑 있는 사기꾼 사무실이 꽤나 바빠지겠지. 진짜 경찰이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덜덜 떨기를 바란다.

위즐 커피를 한 모금. 갤럭시 노트 9가 갑자기 환해진다. 메일이 왔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산드라다. 도망가기 바쁠 텐데, 내게 답장을 한다.

-연락이 늦었죠? 병원 일로 많이 바빠서요. 미안해요. 어젯밤엔 교통사고 환자의 두 다리를 절단했어요.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도리스 여사도 의식이 안 돌아오고 있어요. 도리스 여사를 위한 기도를 잊으면 안 돼요. 경찰 친구 이야기는 대단히 실망스럽군요. 언제든지 오라고 하세요. 병원 주소를 알려드릴게요. 면회도 가능합니다. 마누엘 변호사와 연락이 되지 않고 있어요. 변호사와의 일은 잘 되어가고 있는 건가요? 빠른 답을 기다립니다. - 산드라


그녀가 보내준 주소를 구글에서 검색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 타운의 종합 병원이다. 뭐지? 누가누가 끝까지 거짓말을 하나? 똥 배짱 게임인 건가? 한국놈이 무슨 경찰 친구가 있겠어? 내 거짓말을 파악한 건가? 아니면, 아니면 모든 게 사실인 건가? 내가 진짜 65억의 주인인 건가? 마누엘 변호사는 왜 찾는 걸까? 한 패가 아니란 말인가? 안 된다. 그렇게 흘러가서는 안 된다. 사기꾼일 게 뻔한 은행장에게 나는 이런 이메일을 이미 보내고 말았다.

-친해하는 Frist Bank 은행장님께. 제게 보낸 메일을 제 변호사에게도 한 통 따로 보내 주세요. 이메일 말고, 공식 문서가 있을 텐데요? 이런 메일로는 공증이 안 된답니다. 한국이 금융관리법, 상속법이 굉장히 엄격해서요. 은행장의 직인이 분명히 보이는 문서를 보내 주세요. 제 변호사에게요. 그리고 IMO 인증도 첨부하시고요.

IMO 국제윤리협회. 내가 그냥 만든 가상의 기구다. IMO가 뭐지? 박민우가 창시한 국제기구라서, 너희들은 모를 거야. 밑도 끝도 없는 내 메일에 실컷 당황해 봐. 개자식들을 물 먹이기 위해서, 잔머리를 최대한 굴렸다. 세상엔 없는 박민우 전용 변호사도 뚝딱 만들어냈다. 내가 망친 건가? 진실을 믿지 않은 대가로 받는 천벌인 건가? 마지막 숨을 그르렁 거리는 도리스 여사는 변호사를 부를 것이다. 없던 일로 해주세요. 새로운 유서는 효력을 잃었습니다.

달랏의 하늘은 낮고, 구름은 두껍다. 커피나무는 일정한 높이로 산비탈을 채우고 있다. 상식적이지 않은 거대한 카페. 이곳에 온 모든 이들이 나 정도로 놀라는 중이다. 난간에 팔을 괴고, 족제비 똥 커피를 마신다. 설탕을 듬뿍 넣은 위즐 커피에서 체리향이 난다. 오늘 하루는 내내 지옥이겠구나. 커피를 삼킬 때마다 목젖이 아프다. 산드라가 내 앞에 있다면 무릎 꿇고 빌었을 것이다. 그녀는 너무 멀리 있다. 사경을 헤매는 도리스 여사보다, 산드라에게 훨씬 미안하다.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녀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 다 죽어가는 폐를 안고 그르렁거리는 도리스 여사에게, 내게 65억을 전달하기 위해 번개처럼 서류를 처리해 준 마누엘 변호사, 퍼스트 뱅크 은행장에게, 24시간 가족처럼 보살피는 산드라에게 큰 죄를 짓고 말았다. 나는 얼마나 쓰레기인가? 멀쩡한 천사들을 악마로 만들고, 짓밟고, 낄낄댔다. 65억을 받아선 안 된다. 더 좋은 사람에게 65억이 가기를... 오늘 하루 정도는 나를 저주하며, 내내 후회하겠다. 65억이니까, 하루 정도는 아파도 된다. 피눈물도 콸콸 흘려보고 싶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글로 놀고, 표현하는 글광대입니다. 제가 열심히 글로 추는 모습을 봐주시면, 그저 좋습니다. 관심종자니까요. 즐겁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남아프리카로 오세요. 등신 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