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꾼이겠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가 제가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2월에 베트남 달랏을 다녀온 이야기입니다. 달랏의 이야기면서, 누군가가 65억을 제게 상속하겠다는 메일로 싱숭생숭했던 날들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네, 지금은 상황 종료니까요. 걱정 안 하셔도 되고요.
-도리스 여사는 어떤가요? 차도가 좀 있나요? 산드라 화내지 말아요. 제 친구는 제가 걱정되었을 뿐이니까요.
이 마음을 고작 메일로밖에 보낼 수밖에 없다니. 화상통화라도 하고 싶다. 말로 생긴 오해다. 진심은 몇 줄의 글로 어림도 없다. 달랏의 풍경 영상을 첨부 파일로 보낸다. 이거라도 있으니 좀 낫다. 나의 의심은, 두려움은 충분히 이해될 것이다. 나를 도우려는 사람들뿐이다.
-메일 발송이 실패했습니다. 임시 보관함에 저장할까요?
젠장. 산드라에게 메일이 가지 않았다. 도리스 여사를 걱정하고, 모두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꼭, 꼭 전달되어야 한다. 은행장에게는 뭐라고 하지? 모두 꾸며낸 이야기예요. 변호사도 필요한 공문도 제가 꾸며낸 이야기라고요. 없었던 걸로 생각하면 돼요. 혼란스러웠다면 미안해요. 이런 메일이라도 보내야 하나? 안 보내는 것보다는 낫겠지?
이럴 때가 아니다. 숙소로 돌아간다. 인터넷 환경이 나은 곳에서 제대로 된 사과 메일을 보내겠다. 스마트폰으로 몇 줄이 사과라니. 기본이 안된 놈. 게으르고, 무책임한 놈. 비포장 도로도 섞여있지만, 대체로 포장된 도로다. 꽤 웅장한 산들 사이로, 깨끗한 아스팔트가 뽀송하다. 오토바이를 세우고, 사진을 찍고, 지는 해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듬성듬성 보인다. 서두르지 말자. 이럴수록 천천히. 사고라도 나면, 그깟 65억이 무슨 소용이야. 조심조심 살얼음이다. 65억이 내 손에 쥐어질 때까지, 열 번 생각 후에 행동하고, 말해야 한다. 가만, 이미 내 계좌가 개설되었다며? 돈도 이미 들어와 있다며? 무를 수 없는 거잖아. 내가 동의해야 돈이 움직일 수 있는 거잖아? 이 미친놈아. 뻔한 개수작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거야? 말려들어 보게? 저렇게 당당하게 병원 주소까지 까잖아. 경찰 친구건 누구 건 면회 가능하다잖아. 도리스 여사가 오늘, 내일 하는데 의심만 할 거야?
내 안의 미친놈 여러 마리가 동시에 날뛴다. 근사한 풍경은 내게 닿지 못한다. 케이프타운의 작고 작은 노인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산드라, 이 악마. 끝까지 가보자 이거지? 일이백만 원 뜯어내는 좀도둑이 아니시다? 설령 병원으로 찾아온다면, 변장이라도 해서 만나시겠다? 심리전에 절대 흔들리지 않는, 남다른 배짱. 바둑을 했어야지. 심리학을 공부했어야지. 천하의 강적이다. 숙소에 돌아온 나는, 이들이 결국 사기꾼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진짜일 수도 있다. 진짜여도 65억을 받기 위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새벽 두 시에 눈이 떠졌다. 똥이 마려웠다. 배탈인가? 스마트폰엔 또 메일이 와 있다. 메일을 열기가 무섭다. 나를 혼내려는 것일까? 65억은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일을 망친 나에게 모든 책임이 있음을 알리는, 최후의 메일인가?
-도리스 여사가 별세하셨어요. 이렇게 갑자기 나빠질 줄 몰랐어요. 저에게도 도리스 여사는 가족이었어요. 저도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마누엘 변호사와는 연락이 됐나요? 왜 계속 전화기가 꺼져있는 걸까요?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멀리 있나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 도리스 여사가 65억은 산드라는 모르는 비밀이라고 했다. 산드라는 자신의 허락하에 이메일을 열 수 있다고 했다. 산드라는 내가 한국인인 것도 모르는 건가? 도리스 여사가 돌아가셨다. 65억을 내게 남긴 채 눈을 감았다. 원래 이 거액은 죽은 아들의 몫이었다. 스물여섯에 죽지만 않았어도, 이 돈은 그의 몫이다. 내가 혹시 죽은 아들과 똑 닮은 얼굴을 하고 있나? 잠깐. 산드라는 지금 내가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지. 내가 달랏에 머문다는 글을 여러 차례 보냈다. 사진까지 첨부해서. 도리스 여사만 확인 가능하다고? 경찰 친구 이야기에 발끈한 답은 뭐야? 도리스 여사가 먼저 발끈하고, 간호사는 허락 하에 읽고 발끈한 건가?
똥은 똥대로 누고, 물을 내렸다. 이 개자식들은 서두르고 있다. 경찰 이야기가 나오자 당황했다. 먹잇감 박민우가 눈치를 챘다. 하루 만에 도리스 여사를 죽이기로 한다. 죄책감에 이성을 잠시라도 잃으라는 거지. 죽은 사람 앞에서 나는 차갑기만 하다. 이 죄책감을 덜기 위해선 증거가 필요하다. 다시 브런치로 들어간다. 그녀의 프로필을 본다. 그녀가 팔로우하는 작가는 78명. 이틀 전에는 72명. 사경을 헤매는 동안 6명을 더 팔로우했다. 유령이, 귀신이 구천을 떠돌듯 브런치를 떠돌고 있다. 이제야 편한 숨이 나온다. 이겼다. 사우스 아프리카의 개자식들은 박민우를 속이는데 실패했다. 하나의 목표물에 충실했어야지. 박민우란 놈에게 뜯어먹겠다고 했으면, 끝까지 나에게만 집중했어야지. 그새를 못 참고 또 여섯 명의 작가를 탐색하고 계셨군. 숨이 가빠오고, 맥박이 힘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핸드폰은 안 놓으신 도리스 할머니. 그런 문학적 열정으로 왜 사기꾼이 되셨나요?
나는 이겼지만 졌다. 순간순간 떼돈의 꿈에 한없이 부풀었다. 확신도 자주 했다. 연재 중인 달랏의 황홀이 어마어마한 해피엔딩이 되겠어. 독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결국 누구라도 알 수 있는 헛된 사기에 말려들었다. 돈은 아무것도 아니라더니, 전부가 되어 허우적댔다. 65억에서 떼어갈 세금부터 걱정했다. 도리스라는 한 생명이 어찌 되는지는 그다음이었다. 한참 다음이었다. 별개로 내 어리석음을 보게 된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늘어졌던 감정들은 곤두 솟았고, 아침에 코로 들어오는 공기는 유난히 차가웠다. 사과의 메일이 산드라에게 도착했다면? 산드라는 다시 한번 나를 휘어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기지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 나를 도왔다. 덕분에 손쉽게 경기를 끝낼 수 있었다. 65억의 부자로 일주일을 살았다. 무일푼의 나로 돌아왔다.
이제 달랏이 보일 것이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제가 잘 살고 있습니다. 쓰고 있으니까요. 제 삶의 확신은 독자입니다. 그곳에 계셔 주셔서 , 다가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존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