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랏의 숙소에서 만난 참 즐거운 아침식사

이런 즐거움이 여행의 진짜 즐거움 아니겠습니까

by 박민우

2월에 다녀온 베트남 달랏 여행기입니다. 다시 여행을 꿈꿀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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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야? 아침 식사가 맛있다며? 후기를 다 믿냐고? 반만 믿었다. 반만 믿었을 뿐인데, 빵 쪼가리 하나다.

-덥혀 줄까요?

그러시든가. 부스스한 사장이 머리털로 묻는다.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린다. 백인 여자가 옆에서 달걀 프라이를 한다.


-달걀은 직접 요리해서 먹으면 되는 건가요?

-이건 내가 산 건데. 줄까?

-아, 아니야.


진짜 빵 쪼가리뿐인 아침이다. 최고의 쌀국수가 널린 나라다. 비싸 봐야 이천 원이다. 숙소 아침이 맛있다기에 기대 약간 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에서 온 아가씨 이름은 예케테리나거나, 나디아다. 베트남 사장 이름은 후이거나, 뚜안이거나 짜이다. 이름이 외워지지가 않는다. 귀를 쏜살같이 통과해서는 영영 떠나 버린다. 내게 오는 관심은 당연하지만, 누군가의 이름은 알 바 아니다. 나는 갑자기 말이 많아진다. 처음만 그렇다. 정신과 의사가 친구면 물어보고 싶다. 열정적으로 대화를 이끌어 나간다. 그리고 피한다. 낯을 가리는데, 두 번 째부터다. 얘도 나처럼 부담스럽겠지? 이런 생각을 굳이 하고, 확신한다. 도시락 라면이 어느 나라 거게? 오리온 초코파이는 어느 나라 거게? 예카테리나일 수도 있는 나디아는 우리나라(러시아) 거 아니냐고 답한다. 한국 거야. 예상대로 깜짝 놀란다. 영국 애들을 만나면 되지도 않는 영국 영어를 흉내 낸다. 스페인 애들을 만나면 올라, 꼬모 에스따스. 알고 있는 스페인어 열 단어를 빠르게 지껄인다. 중국 애들을 만나면 한꿔렌(한국인)을 여러 번 반복한다. 일본 애들과는 한국 음식, 일본 음식 이야기로 날도 샐 수 있다. 5분 안에 어떤 나라, 어떤 연령대든 홀릴 수 있다. 이래도 저래도 안 통하면 나 글 쓰는 사람이야. 비밀을 까발리고 화들짝 신비로워진다. 설마 책을 낸 작가는 아니겠지? 블로그에 쓰는 글? 재차 묻는다. 책 열 권을 쓴 작가야. 이때부터 순조로워진다. 정체를 드러내는 건 드문 경우다. 관심이 고프지만, 고프지 않기도 해서, 고립을 택한다. 예카테리나와의 대화는 십오 분 정도가 좋겠다. 늙은 남자가 어린 아가씨에게 질척대는 인상을 주기 싫다. 호소력 넘치는 말솜씨, 깔끔한 매너. 어머 저 남자는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거야? 이런 두려움을 아주 약간만 주고 싶다. 위기가 한차례 찾아왔는데, 예카테리나의 달걀 딱 한 알만 빌려도 될까? 묻고 싶어졌다. 달걀 한 알을 손에 넣기는 하겠지만, 대화는 십 분 추가야. 정신이 번쩍 든다. 전자레인지에 빵 하나 후딱 먹고, 쌀국수 먹으러 나가겠다.

-설탕 우유랑, 그냥 우유 중엔 어느 게 좋아요?

-설탕 우유요? 그런 우유도 있어요?

예카테리나가 웃는다. 설탕 우유를 고른다. 종이 용기 우유다. 베지밀이나 삼육 두유처럼 테트라팩 용기. 오, 맛있군. 어릴 때 설탕 한 숟가락 풀어서 휘휘 저어 먹던 흰 우유가 떠오른다. 이제 바게트를 먹을 차례. 베트남 바게트 반미는 가볍고, 부드럽다. 솜처럼 찢어진다. 입천장이 다 까지는 프랑스 바게트와 근본부터 다르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안 찬다. 소화력이 극히 떨어지는 내게, 베트남 바게트 반미는 위장병 환자에게 공급되는 병원식이다. 아니 의약품에 가깝다. 소화제를 바른 빵처럼 쑥 들어오고, 쑥 내려간다

응?


뭐가 더 있네? 양념된 닭고기가 가득하다. 지금까지 먹었던 어떤 반미 샌드위치보다 충실하다. 안 보이니까, 오해를 하지. 소를 꽁꽁 감춰서 나를 실망시키는 거야? 적당히 따뜻하니까, 닭고기 육즙이 더 꿀렁대잖아. 반성하는 의미로 더 환장하고 먹어 주마.

-내일 아침은 똑같은 반미 샌드위치로 드릴까요? 아니면 쌀국수로 할래요?

-쌀국수도 가능해요?

-그럼요.

후기와 평점. 이 두 개만 보고 숙소를 고른다. 아침밥이 맛있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3층으로 된 숙소다. 내 방은 3층 다락방이다. 빈방이 좀처럼 안 나는 인기 숙소다. 코로나 바이러스 덕에 빈방이 나왔다. 샤워기나 수도꼭지, 조명을 보면 꽤나 살던 집이다. 마감재를 좋은 걸 썼다. 하루 만칠 천 원이다. 아침밥까지 준다. 마당엔 귀여운 강아지 네 마리가 붙어 다니고, 싸우고, 짖는다. 사장 어머니로 보이는 이는 절대로 웃지 않는데, 일단은 기분이 상한다. 공산당 간부였나 봐. 고개 조아릴 일이 없었는데, 손님이란 것들을 상대할 수밖에 없게 된 지금의 처지가 싫다.


-달랏 사람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과는 달라요. 순하고, 정직해서 다들 좋아하죠. 사업하는 사람들은 다들 외지 사람들이에요. 도시 사람들이 큰돈을 싸들고 와서 달랏 돈을 쓸어가요. 여기 사람들은 그래서 돈이 없어요. 이곳 젊은이들은 도시로 떠나요. 큰돈을 벌기 위해서요. 도시 사람들은 큰돈을 벌기 위해서 달랏으로 오고, 달랏 사람들은 큰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가죠.

따뜻한 차를 내온다. 이 숙소는 청결함으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아내와 여동생이 위층에서 복작복작 손님이 나간 방을 치우는 중이다. 정신병에 걸린 사람처럼 쓸고 닦아야 만점이 나온다. 질 지은 집이다. 자기네 땅에 숙소용으로 지은 집이다. 우리나라 돈으로 1억 조금 넘는 돈이 들었다고 한다. 베란다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 빛이 흠뻑 들어오는 욕실, 하늘로 뚫린 작은 창문. 방이 좀 춥고, 천장이 낮아 답답한 감이 있지만 만 칠천 원에 이 이상의 방은 없다. 다음에 온다면 2층 이만 원 방에서 묵고 싶다.

-달랏에서 꼭 가야 할 카페를 추천해 주실래요?

예카테리나는 나와 더 떠들기를 바라는 걸까? 꺼져주기를 바라는 걸까? 꺼져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오늘 밤부터는 늦게, 늦게 들어올 것이다. 이런 눈치로 스스로가 피로해지는 게 지긋지긋하다. 섬으로 살다가 화석처럼 죽겠다. 일어선다. 빨리 나가고 싶다.

-Tung 카페로 가세요. 달랏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드실 수 있을 거예요.


PS 매일 글을 씁니까? 덕분에 여러분들과 이렇게 알고 지내게 됐네요. 제 글을 읽으면, 그 누구보다 저를 많이 아시는 거예요. 가까운 친구 한 명 장만하세요. 자주 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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