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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탈로 깬 새벽 네 시 - 아파도 씁니다

나의 꾸준함이 작은 길로 이어지기를 바라요

by 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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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시간으로 새벽 네 시에 일어나요. 배탈이 나서요. 어제저녁부터 기미가 보이더니요. 몸에 약간의 열기운도 있어요. 오호. 오래간만에 아프려나 봐요. 원래는 밤 열두 시까지는 어떻게든 글을 끝내려고 해요. 어제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눈꺼풀이 열리지 않을 정도로, 잠이 쏟아지더군요.


매일 글을 씁니다


어떻게든 지켜야죠. 하루라도 안 쓰면, 둑이 무너지듯이 저의 약속도 무너질 거예요. 하루라도 안 쓰잖아요? 망했어. 내 약속은 훼손됐어. 구멍이 하나 뚫리면 그건 이미 우산이 아니야. 절망의 핵심은 과장이죠. 글을 때려치울 거예요. 그래서 굳이 새벽 네 시에 이 글을 씁니다. 진짜 강한 사람은 어떻게든 쓰는 사람이 아니라 안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새로 시작하는 거예요. 나는 실패했어. 나는 쓰레기야. 이렇게 주접떠는 거 말고요. 새 도화지에 새로 시작하면 되지. 오뚝이처럼 반복해서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어요. 왜냐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대단한 것 같지만 사소하고, 사소하지만 대단해요. 하지만 제삼자가 보면 다 사소하죠. 띄엄띄엄 바라보죠. 그것도 진실이죠. 남의 눈에 보이는 제 모습엔 훌륭한 거리감이 있죠. 나나 심각한, 스스로 갇힌 1인용 게임에 지나치게 몰두하죠. 뭔가를 이루겠다. 그 비장함 보다요. 그냥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는 느낌을 즐겨야죠. 거기에 전부가 있죠. 이룬다는 게 뭘까요? 매일 백만 명이 제 글을 기다리면 이룬 걸까요? 지금의 저로서는 그거면 이룬 거죠. 대단한 영광이죠. 자, 이루었습니다. 그러면요? 이제 그만 쓸까요? 대충 쓸까요? 더, 열심히 쓸까요? 악플도 당연히 늘어날 테죠. 옛날 글과 비교하며 초심 운운하는 사람도 있겠죠. 무시할까요? 귀 담아 들어야 할까요? 악플이기만 할까요? 저를 더 정확하게 보는 사람의 지적일 텐데요. 저를 아프게 하면 다 악플일까요? 모든 변화에는 일정량의 에너지가 필요하죠. 궤도를 바꾸는 게 쉬운 일이겠어요? 잠깐 아플 수도 있고, 오래 아플 수도 있죠. 어쨌든 지금 이 순간은 역시 변화의 시작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매일 건강하고, 매일 우월하다면 좋은 글은 힘들 거예요. 케이크만 먹었던 사람이 쑥개떡의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이해라는 말을 들먹이면 웃기겠죠? 상처도 잘 받고, 부끄러울 정도로 세속적이고, 잘 아프고, 많이 두렵고,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발작적으로 증오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사람이어야죠.


홀로 깨어 있는 이 밤이 좋네요. 천둥 번개가 내려치더니, 금세 그쳤어요. 조금 더 내려주지. 씻겨 내려가는 비의 기운으로 씁니다. 아침엔 죽을 먹을 거고, 종일 누워 있으려고요. 변태 같은데, 몸살 기운에 누워 있는 게 좋아요. 오래 아프지만 않는다면요. 죽을 병만 아니라면요. 세상의 모든 잠 못 드는 이들에게 이 마음이 전해지기를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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