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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11년 차 내게 일어난 변화

거북이처럼 느릿느릿한, 깜짝깜짝 잘 놀라는 토끼가 되었습니다

by 박민우

태국에서는 아이를 입양해서 청소 세제를 먹인 엄마로 난리가 났네요. 이미 큰 딸은 죽었고요. 둘째인 아들이 병원에 왔을 때 의사가 수상히 여기면서 세상에 알려졌죠. 엄마는 아이가 아프다면서 기부금을 뜯어냈답니다. 입양할 셋째를 찾는 중이었대요. 이웃들이 볼 때는 그렇게 멀쩡하고, 아이에게 잘하는 엄마였대요. 지구의 바이러스는 인간이 아닐까요?

DSC06288.JPG 방콕 차이나 타운


그래도 저는 태국 사람을 좋아해요. 선한 사람이 훨씬 많으니까요. 방콕에 머문 지 11년이 되어 가네요. 태국에 머물면서 저 역시 많이 달라졌죠.


첫째. 느린 것에 관대해졌어요. 태국 사람들은 클랙슨도 거의 누르지 않아요. 차가 눈앞에서 꿈쩍 안 해도, 무슨 이유가 있겠지. 기다려줘요. 마트 계산대에 줄이 길잖아요. 우린 어떻게든 가장 짧은 줄을 찾죠. 옆 줄이 빨리 준다 싶으면 냉큼 옮기고요. 태국 사람들은 절대로 안 그래요. 그냥 긴 줄 뒤에서 스마트폰 깨작대면서 기다려요. 계산대 직원이 우리나라 기준으로는 속 터지죠. 그래도 상관 안 해요. 언젠가는 계산이 끝날 테니까요. 배달 음식이 아무리 늦게 와도 전혀 놀랍지 않아요. 한 시간 정도까지 생각해요. 그런데 웬일입니까? 요즘 그렇게 빨리 올 수가 없어요. 경쟁이 치열해져서일까요? 음식 주문하면 20분이면 와요. 조리하고, 배달하는데 20분이라뇨? 태국 사람들도 치열함 속에 너무 빠릿빠릿해지고 있어요. 불경기에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죠. 각박해지면 제가 사랑하는 그 태국이 아니라 이 빠릿빠릿함이 불길합니다. 천천히 천천히 변해 주세요.


둘째. 누군가에게 잘 못 묻겠어요. 태국 사람들은 환불도 잘 안 하고요. 길도 잘 안 물어보고요. 뭘 더 달라. 이렇게 해달라 꼬치꼬치 요구하지를 않아요. 저는 하죠. 쌀국수에 국물 좀 더 달라. 선지는 빼 달라. 쏨탐에 설탕은 조금만 넣어 덜라. 저만 유난 떤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 자제해요. 자신들이 안 하는 건, 남들이 할 때도 딱히 좋아 보이는 건 아니라는 거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저도 자연스럽게 소심해져요. 뭔가를 요구할 때는 심호흡해요. 길을 물어볼 때도요. 나름 큰 용기를 내는 거죠. 저절로 수줍어지게 만들어요. 이 나라가.


셋째. 잘 놀라요. 깜짝깜짝. 워낙 평화롭고, 나른한 나라잖아요. 그러니까 어디서 큰 소리가 나면 쉽게 놀라요. 뉴욕은 방콕과 정 반대의 도시라서요. 5분마다 구급차 소리가 들리더군요. 특히 맨해튼 주변이요. 누가 죽었는지, 아픈 건지, 불이 난 건지. 그렇게 출동이 잦을 수가 없어요. 방콕은 도시조차 상대적으로 고요해요. 그걸 언제 실감했냐면 방콕 친구들이 서울 놀러 왔을 때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흠칫 흠칫 자주 놀라더군요. 클랙슨 소리, 빠르게 걷는 사람, 확성기에서 나오는 소리, 소리, 소리. 서울도 꽤나 시끄러운 도시였던 거죠. 저는 이제 자주 놀라는 토끼 같은 인간이 되었습니다.


넷째. 어설퍼도 괜찮아. 완벽하지 않아도 돼. 세상 보는 기준이 좀 너그러워졌어요. 헬스 트레이너 하면 근육질에 쭉쭉 빵빵이 떠오르시죠? 훨씬 뚱뚱하고 체지방도 많아 보이는 헬스 트레이너가 있어요. 처음엔 회원인 줄 알았죠. 진지하게 회원들 동작을 잡아줄 때 깜짝 놀랐네요. 체지방이 손님보다 많은 헬스 트레이너가 우리나라에도 있을까요? TV 데이트 프로그램엔 하나도 안 예쁘고, 안 잘 생긴 출연자들이 당당하게 나오고요. 하나도 안 신기한 재주를 보여줘도, 몸치가 춤을 춰도 사람들은 감동하고, 박수를 쳐줘요. 굳이 맛집을 찾아 멀리 가지 않는 것도, 동네 맛집에 만족해서죠. 더 맛있는 건 딱히 필요 없어. 그런 마음으로 살아요. 평생 행동반경 5km를 안 벗어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다섯째. 샤워를 하루에 두 번 이상 해요. 더우니까 당연한 거죠. 태국 사람들이 땀과 냄새에 민감해요. 남의눈도 엄청 의식하고요. 동남아시아는 왠지 더러워. 그런 편견 많으시죠? 노점에서 파는 쌀국수를 보면 딱히 깨끗해 보이진 않죠. 그들 나름 엄청 열심히 관리해요. 상한 음식으로 배탈이 쉽게 나는 나라라서요. 땀범벅이 된 채로 카페에 들어가는 게 눈치가 보여요. 그래서 카페 가기 전에 샤워하고, 뽀송한 상태로 가요. 세제나, 샤워젤도 냄새가 좋은 걸로 고르려 하고요. 가끔 한국에 가면, 한국 냄새가 강렬해요. 특히 밤의 지하철에서 나는 마늘, 파, 고기, 술의 엽기적인 조합이요. 숨을 쉽게 못 쉬겠더군요. 평균적으로는 한국 사람들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나요. 섬유 유연제가 좋아지고, 다양해져서요.


느린 나라에 살다 보니 뇌가 코알라처럼 퇴화되는 게 걱정이죠. 어렵고 힘들다 싶은 일에 도전하면서 살려고요. 뇌는 빠릿빠릿, 마음은 코알라.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밸런스입니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숨을 쉬듯 글을 쓰고 싶어요. 자연스럽게, 하지만 못 쓰면 죽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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