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은 열두 살' 인생 미드, 인생 감동

케빈, 너는 잘 지내고 있니?

by 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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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랑 한참 전부터 TV 앞에서 대기하고 있어요. 케빈은 열두 살을 보려고요. 저는 중3이거나, 고등학생이었을 거예요. 이런 드라마는 처음이었어요. 모든 장면이 소중해서, 오려 두고 싶을 정도였죠. 어른이 된 화자는 자신의 열두 살을 회상해요. 마당이 넓고, 띄엄띄엄 지어진 그림 같은 미국의 주택가. 제 기준으로는 넘볼 수 없는 부자지만, 미국에선 그런 집에 살아도 살기 팍팍하더군요. 아버지는 늘 피곤해요. 씀씀이에 민감하죠. 어머니는 언제나 자상해요. 형 웨인은 늘 동생을 괴롭히죠. 깐죽거림 대마왕. 선을 아슬아슬 안 넘을 것 같지만, 넘어요. 그걸 형과 나는 같이 보면서 낄낄대요. 그럴 처지가 아니거든요. 나는 피해자라서요. 늘 형에게 괴롭힘을 당했으니까요. 형은 좀 찔려야 맞고, 저는 웃을 기분이 아니어야 했죠. 그런데도 바보 형제는 좋아 죽어요. 첫사랑 위니, 어리바리 친구 폴이 주축이 되어 이야기가 전개되죠. 점점 이뻐지는 위니가 여자로 보이고, 어떻게 다가가야 하나 안절부절못하는 케빈이 이야기의 핵심이죠. 그 어린아이들이 꽤나 진하게 키스를 하는 장면도 있어요. 놀랍지 않나요? 1980년대에 만들어진 TV 드라마가 그 정도로 과감하다니요? 베트남 전쟁과 불경기를 관통하는 이 드라마는 그래서 지극히 현실적이죠. 있을 법한 사소한 일상 중에는 역사의 비극과 정치적 혼란도 예외일 수 없음을 보여줘요. 짠돌이 아버지는 케빈에게 매주 2달러를 용돈으로 줘요. 터무니없이 적은 용돈에 화가 난 케빈은 골프장 캐디를 해보기로 해요. 캐디로 데뷔하는 날 하필 아버지와 아버지의 상사가 게임을 하죠. 아버지는 넣을 수 있는 공을 일부러 흘려보내요. 케빈은 그날 번 돈으로 아버지에게 점심을 사요. 크리스마스에 향수 선물을 들고 위니네 문을 두드리지만 위니는 집에 없어요. 위니 오빠 브라이언이 베트남 전쟁에서 죽었거든요. 오빠가 죽은 마당에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가당치 않죠. 그래서 가족 여행을 떠난 거죠. 그렇게 케빈의 크리스마스는 엉망진창이 됩니다. 아빠, 칼라 TV 우리도 들여놔요. 이 말 한마디를 못해서 쩔쩔매는 케빈, 뭐야, 저 사람은 옷이 왜 회색이야? 먹는 음식이 회색인가? 투덜대기 신공을 펼치는 형, 웨인. 결국 칼라 TV가 집으로 들어오죠. 장례식장에서 할머니(할아버지였나요?)가 누운 관에 지폐를 떨구죠. 그걸 집어 와야 하는데, 차마 시신에 손을 댈 엄두가 안 나요. 어쩌지? 어쩌지? 죽음 앞에서도, 돈이 더 커져 버리는 현실도 세련되게 보여주죠. 사실 오늘 이 이야기를 쓰면서 유튜브에서 몇 개의 동영상을 찾아봤어요. 누군가가 올려놨더라고요.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케빈이 아버지에게 점심을 사는 장면에서요. 어른이 된 케빈은 행복할까요? 열두 살 이후엔 내리막 길인 걸까요? 따뜻한 드라마인데도, 냉정한 현실감이 공존하죠. 커갈수록 기댈 곳은, 열두 살의 과거뿐. 이 드라마는 평생 남는 충격이 됐죠. 잔잔하게, 오래오래 남는 충격. 모든 걸 빨아들일 준비를 했던 사춘기 소년이 사춘기 소년을 만난 거니까요. 가끔은 미국이 고향 같을 때가 있어요. 이 드라마 때문에요. 해 질 녘 케빈의 아버지와 캐치볼을 하고 싶네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글로 소통되는 힘을 믿어요. 오늘도 잘 지내셨나요?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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