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백인 우월주의는 어디에서 왔을까?

백인은 다 왕자님, 공주님인 줄 알았죠

by 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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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어릴 때만 해도 외국인은 상상 속의 존재였죠. 미아리 숭인시장 앞에 두 명의 외국인이 등장한 날, 꼬맹이들은 난리가 났죠.


-롯데 살로우만, 롯데 살로우만 빠바밤


롯데햄 CF 흉내를 내요. 살로우만이 영어인 줄 알았거든요.


-너네, 아저씨한테 혼나 볼래?


그중 한 명이 정색을 하고, 우리를 노려봐요. 깜짝이야. 한국말을 할 줄 아네요. 아이고, 무서워라. 멀찌감치 떨어져서 계속 쫓아가요. 무섭지만, 그렇다고 영화에서나 보는 백인을 어찌 포기하나요? 어라? 두 외국인이 우리 집으로 들어가네요. 이게 말이 되나요? 로또 당첨도 이 정도로 놀랍지는 않을 거예요. 우리 집에 세 들어 사는 아저씨가 학원 영어 선생님이었어요. 직장 동료였던 거죠. 너무 좋은데, 들어갈 수가 있어야죠. 저는 까불다가 혼난 몸이잖아요. 내 집인데, 우리 집인데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만 쩔쩔 맨 기억이 나요. 한 번 더 보고 싶은데,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고 싶은데 두 외국인은 오래오래 방에서 나오지를 않더군요.


다들 백인에 대한 환상이 있지 않나요? 아니라고요? 요즘 친구들은 다를 수도 있겠네요. 이미 생활 속 친구일 테니까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백인들의 세상은 천국이었어요. 서부 개척 시대를 그린 '초원의 집'이 시청률 1위를 찍었던 때이기도 하죠. 미국판 '전원일기' 정도겠네요. 분명 서민이고, 어려운 형편인데도 스테이크를 먹네요? 일요일 교회를 갈 때는 드레스를 입고요. 미국만 가면 거지도 스테이크를 먹겠구나. '미제'는 부자의 상징이었죠. 동대문 도깨비 시장에서 미제 치즈, 미체 땅콩버터, 미제 델몬트 통조림을 사 먹는 집은 엄청 부자였어요. 미제 연필, 미제 필통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어릴 때부터 뼛속 깊이 미제의 환상이 주입됐죠. 이제 와서 그건 잘못이야. 탓하기엔 백인 우월주의가 너무도 당연했어요. 못 살 때라서 더 그랬나 봐요. 우리에게 없는 풍요가 있었으니까요.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그런 환상은 당연히 깨지죠. 다들 사람이니까요. 우리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모두 같나요? 백인도 이런 사람 있고, 저런 사람 있는 거죠. 같이 술 퍼마시고 누구 인생이 서럽나 배틀이라도 하면, 내가 백인인지, 얘가 한국인인지 헷갈리기만 해요. 벨기에 사람이었을 거예요. 치앙마이 숙소에서 마대자루를 들고 주인장을 내려치려고 했죠. 경찰 부르고 난리가 났어요. 약에 취한 건지, 술에 취한 건지. 나사가 여러 개 빠진 그냥 미친놈이었죠. 라오스 방비엥에서는요. 버스 중간 통로에 한 백인이 똥 싸는 자세로 앉아서요. 고개를 좌우로 까딱까딱 버스가 출발한 지 언젠데 그러고 있는 거예요. 그때 방비엥은 마약이 흔했어요. 독한 마약을 한 것 같았죠. 신기한 게 그 흔들리는 버스에서 귀신처럼 중심을 잡더라고요. 중국에서 만난 미국 청년은 두 시간도 안 돼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거예요. 분명 같이 저녁을 먹었거든요. 얼굴은 배우 뺨치게 생겼는데, 허리통만 비만이었어요. 운동을 해야지. 비만은 게을러서야. 그 생각이 완전히 깨진 날이기도 했죠. 저렇게 신진대사가 왕성한 아이는 밤이 지옥이겠구나. 어떻게든 안 먹으려고 애를 쓰는 그 친구가 아직도 눈에 선해요.


사람 많이 만날수록 별 거 없어요. 피부색으로 달라질 거면, 우린 중국, 일본 사람과 같아야죠. 아니잖아요. 좋은 사람은 좋고, 별로인 사람은 별로인 거죠. 중요한 건 나죠. 우리나라에 대해서 유창하게 잘 설명할 수 있나요? 그런 사람은 외국 친구에게도 인기 만점이죠.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야. 이 말엔 질색을 하더라고요. 한국에 오래 산 외국 친구들이 특히 그래요. 사계절은 어느 나라나 뚜렷하다는 거예요. 우린 우리 기준으로만 뚜렷한 것일 뿐이죠. 우리나가 젓가락이 왜 가장 얇은지, 금속으로 만들었는지, 북한과 우리는 왜 갈라졌는지에 대해 말해줘 보세요. 여전히 한국과 북한은 왕래가 불가능하다고 하면 입을 다물지 못해요. 세상에 그런 나라가 존재하는구나. 우리나라에 대해 박식할수록 외국인 친구들이 좋아해요.


톡 까놓고 한국인이 벼슬인 시대예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분에 넘치는 사람을 받죠. 살다 보니 이런 세상도 다 오는군요. 한국인에게 환상을 갖고 있는 외국인에게, 이왕이면 환상 쭉 심어 주세요. 조금 더 친절하고, 조금 더 잘 웃어주면 돼요. 우리와 찍은 사진 한 장이 어떤 아이에겐 인생 추억이 될 수도 있어요. 조금 뿌듯해져도 괜찮아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무얼 할까? 이런 비장함 말고, 나나 잘 살자. 작고 작아진 저에게 충실하고 싶어요. 그게 제가 매일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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