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가가 미래의 주인공이 아닐지도 모르죠
갑자기 과 친구 제현이가 떠올라요. 친구라면서 연락한 지 5년은 됐겠네요. 제가 이런 몹쓸 놈입니다. 불현듯 카카오톡으로 들어가 봐요. 무슨 사진을 올렸을까? 한강 사진 하나, 단풍 사진 하나. 그것도 2015년부터 띄엄띄엄. 이럴 줄 알았어요. 세상 참 무덤덤하게 살아요. 얘는 무슨 낙으로 살까요?
제가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예요. 93학번. 또 떨어지면 수능을 준비해야 해요. 게다가 재수생. 벼랑 끝 심정으로 시험에 임했죠. 아니, 벼랑 끝 맞죠.
-형, 저 두 개밖에 안 찍었어요. 헤헤.
수학 시험이 끝나고, 한 놈이 좋아 죽어요. 저 자식 뭐지? 형은 또 뭐야? 학력고사는 한 교실에 같은 과 지원자를 모아놓고 시험을 봐요. 이 놈이 떨어져야 내가 붙는다. 잔인한 서바이벌 게임이죠. 93년도 학력고사가 역대급으로 쉬웠어요. 물수능 아니고 물학력고사였죠. 학력고사 역사상 가장 쉬웠어요. 수학은 주관식 문제 하나만 빼면 반에서 10등 정도면 풀 수 있는 문제뿐이었죠. 두 개나 찍을 게 어디 있어? 이건 심리전이다. 형이란 놈은 고등학교 선배인가 보군. 둘이서 짜고 우릴 방심하게 하시겠다? 정신 바짝 차려라, 박민우. 저것들은 시험에 붙으려고, 연기까지 하잖아. 대본까지 짜 왔잖아. 저 놈이 진짜로 수학 문제를 두 개나 찍었으면 백퍼 떨어진다. 어허, 붙었더라고요. 형이란 놈은 우리 과 수석이었을 거예요. 성적 까 보니까 저보다 점수도 높더라고요. 두 개밖에 안 찍어서, 진심으로 기뻤던 거죠.
제현이는 제가 무슨 이야기만 하면 웃겨서 숨을 못 쉬어요. 민우야, 와 이리 웃기노. 큭큭큭. 저를 교주 취급했다니까요. 열혈 신도였죠. 중간고사, 기말고사 때는 같이 합숙까지 했어요. 저는 공부가 제일 싫었어요. 자다가, 먹다가, 자요. 얘도 뭐 대충대충, 노트에 끄적대긴 하지만 영혼이 없어요. 제 착각이었죠. B뿔 이상은 나와요. 천재인가? 머리도 좋았겠지만, 포인트를 잘 잡더라고요. 이게 나오겠다. 여기를 파자. 전체를 통달하겠다는 욕심을 내지 않더라고요. 동물적 감각이죠. 도박을 했으면, 더 잘 나갔을 것 같은? 더 어렸다면 프로 게이머로도 날리지 않을까요? 완벽을 꿈꾸지 않아서, 더 유능해지는 경우죠. 저는 일단 완벽을 꿈꾸고 나가떨어지죠. 안 해, 안 해. 도 아니면 모죠. 에이뿔도 못 받을 거, 뭘 그리 열심히 해? 그렇게 시험을 망쳐요. 국문과 대다수가 방송국이나 신문사, 혹은 교수에 목을 맬 때, 이 아이는 무조건 교직이었어요. 지금이야 선망의 직장이지만, 그때는 폼나는 언론계 쪽이 최고였거든요. 얘는 야심이 없나? 맞아요. 야심 제로의 인간이죠. 여자 친구랑 싸우면 무조건 지고, 빌어요. 그 누구도 제현이에게 질 수 없어요. 대신 게임이나, 당구는 발군이죠. 결혼도 일찍 하고, 아이도 일찍 갖고. 무난무난, 설렁설렁. 성룡의 취권 같은 아이랄까요? 만만해요. 상대방을 띄워 주죠.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도 크게 관심 없어요. 내 인생은 조연이 편해. 우월감의 무가치를 진즉에 깨달은 도인이랄까요?
제현이란 이름을 써도 될까? 얼마나 연락을 안 했으면, 이런 게 눈치가 보이냔 말이죠. 우리 사이에 말이죠. 5년 만에 메시지를 보내 봐요.
-민우야. 오랜만이데이. 정말 너무 반갑다. 빈말 아니고, 엄청 반갑다. 응, 그래. 내를 썼나? 잘했다. 나야, 잘 있지. 이 학교에서 이십 년 됐다. 십오 년 더 일해야 정년퇴직이다. 정년퇴직 때까지 꾹꾹 채울라고. 안 지겹냐고? 재밌다. 다 재밌기야 하겠나? 그래도 재밌다. 너나 잘 봐주는 거지. 나 뭐 없다. 우리 언제 보노. 민우야, 진짜 반갑데이. 우리 자주 연락하자.
우린 잠시 93년으로 돌아가요. 제가 이 색기만 믿고 MBC 개그맨 공채 시험 봤다 떨어졌잖아요. 제가 그렇게 웃기다잖아요. 철썩 같이 믿었죠. 칭찬이 제일 쉬운 놈이 귀가 제일 얇은 놈을 구워삶은 거죠. 진짜 고수는 꼭 먼 곳을 보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어요. 이놈이 제일 영악해요. 미운 사람도 없고, 엄청 좋은 사람도 없어요. 아니다. 제가 그나마 좀 윗자리겠네요. 큰 상 받은 것처럼 뭉클하네요. 누구나 행복하고 싶죠. 행복의 조건이야 다들 다를 거예요. 요즘 들어서 요놈이 지혜고, 정답이란 생각을 해요. 제 인생관을 대폭 수정해야겠어요. 뭐, 저도 딱히 야심가는 아니지만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눈을 뜨면 살 겁니다. 눈이 안 떠지면 죽을 겁니다. 우리 단순하게 살아요. 단순함이 우리에게 주는 양분을 마음껏 섭취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