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증세 좀 봐 주세요. 치매는 아니죠?

노화는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납니다. 제길

by 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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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쓴 글을 모두 지웠어요.


<태국에서 11년간 머물면서 내게 일어난 변화>


를 툭탁툭탁 써 내려갔죠. 야호 끝냈다. 그때 누군가가 제가 쓴 글에 좋아요를 눌러요. 무슨 글이지?


<태국 11년 차 내게 일어난 변화>


같은 내용을 쓴 줄도 모르고 또 쓰고 있었던 거죠. 5월 27일에 쓴 거니까 딱 50일 전이네요. 어제는 쓰레기를 버리고 도어록 비밀번호를 띠띠띠 누르는데 어라? 문이 안 열리는 거예요. 다시 눌렀어요. 안 얼려요. 지금 무슨 번호를 눌렀던 거지? 그것조차 모르겠어요. X 됐다. 머릿속이 백지가 되면서 수천 번은 썼을 그 번호를 기억해내려 애써요. 결국 들어는 왔어요. 충격이 가시지를 않더군요. 노화는 팔자 주름에만 찾아오는 줄 알았더니요. 드디어 뇌로 번지고 있나 봐요. 예전에 후배가 같은 이야기를 흥분해서 또 할 때 소름 돋은 적이 있어요. 며칠 전에 기승전결을 갖춰서 했던 이야기를, 너무도 새롭게 나불대는 거예요. 빠릿빠릿하던 애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럴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게 노화인가 봐요. 물 좀 마시려고 주방에 갔다가 또 한 번 철렁. 숟가락이 있어야 할 자리에 칫솔이 꽂혀 있는 거예요. 에이, 이건 그냥 생각이 많아서인 거죠? 설마 내 소중한 칫솔은 숟가락 옆에 모시고 싶어. 이랬을 리는 없잖아요. 이런 걸로 치매 운운하는 건 오버죠?


술 마시고 필름 끊긴다는 것도 새빨간 거짓말인 줄 알았죠. 어느 날 아침 침대 시트가 피로 물들어 있더군요. 자세히 보니 피는 아니었어요. 전날 마신 와인을 토했더군요. 토한 기억도 없고,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전혀 기억에 없었죠. 홍대 앞 고시원에서 살 때였는데, 엉금엉금 기어서 들어왔다는 건 저를 바래다준 선배의 증언으로 알 수 있었죠. 괴기 영화가 따로 없더라니까요. 온 방안이 피칠갑을 한 것처럼 얼룩덜룩. 누워서 토하다가 식도라도 막혔어 봐요. 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었죠.


아, 라오스에선 경찰서에 끌려간 적도 있군요. 자랑 아니고요. 치욕을 고해하는 겁니다. 쌀로 빚은 라오스 소주가 있어요. 40도 훌쩍 넘는 독주예요. 라오스 사람들이 주는 대로 마셨더니, 갑자기 경찰서인 거예요. 아니다. 경찰서는 기억이 나요. 술을 퍼마시고, 뚝 끊겼는데, 갑자기 컴컴한 라오스 시골 길인 거예요. 어디로 가나요? 어이가 없더라고요. 망망대해에서 한반도 찾기처럼 막막함 그 자체더군요. 남의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어요. 경찰이 출동하고 난리가 났죠. 저라고 뭐 남의 집에 들어가고 싶었겠어요? 제 숙소를 찾아야 할 거 아닌가요? 야심한 밤에 아무에게라도 물어봐야죠. 길에 사람이 없으면, 집 안에 있는 사람에게라도 물어야죠. 경찰서에 끌려가서는 파닥파닥 날갯짓을 하며 휘젓고 다녔네요. 한국말로 난다, 난다를 반복하면서요. 이건 다분히 계산적인 행동이었죠. 외국말로 천진하게 술주정을 하면, 곱게 풀어 주겠지. 착한 라오스 경찰이 숙소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줬네요. 네, 다음날엔 저를 죽이고 싶더라고요. 진짜 술은 백해무익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저에게는요.


제게 안 일어났다면, 건망증, 치매, 필름 끊기기를 믿지 않았을 거예요. 네, 사실입니다. 인정할게요. 저도 산증인이니까요. 에휴, 흰머리나 주름보다 뇌의 노화가 더 심란하네요. 뇌를 활성화하려면 아무래도 도전을 많이 해야겠죠? 어렵다 싶고, 꺼려지는 일들에 달려들어야겠죠? 발레를 해야겠어요. 가장 감동적인 영화가 <빌리 엘리엇>이니까, 이건 신의 계시인 거죠. 보세요. 징그럽다, 재수 없다. 기를 쓰고 저를 말리는 여러분의 시선이 느껴져요. 세상의 반대를 무릅쓰는 것처럼 어려운 게 또 있겠어요? 발끝을 세우고, 빙글빙글. 발톱이 먼저 빠질 것인가? 무릎이 먼저 나갈 것인가? 흥미롭지 않나요? 태국 전통 무용을 태국 친구들이 강력 추천하네요. 손가락이 자유자재로 꺾이는 제가 태국 전통 춤 영재라네요. 허허, 허허허. 한국인 최초로 태국 춤 인간문화재 갑니까?


PS 매일 글을 씁니다. 하루 세 끼 쌀국수를 먹을 수 있는 돈과, 글을 쓸 수 있는 손가락, 쌩쌩 잘 돌아가는 아수스 노트북이 있습니다.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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