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백만 명이 태어나던 시절의 삶
저는 73년생이에요. 통계청 자료를 보니까 96만 명이 태어났더군요. 1957년부터 71년까지는 매년 백만 명 이상의 아기들이 태어났어요. 인구가 너무 많아서 두려움에 떨던 시절이었죠. 이렇게 인구가 폭발하면 우리나라는 거덜난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셋째가 있는 집은 눈치를 봐야 했어요. 나라에선 둘만 낳으라고 노래를 했으니까요.
1.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
아기는 많았지만 삐쩍 곯은 아기들이었죠. 보릿고개까지 겪으면서 먹을 게 넉넉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포동포동 아기를 뽑는 대회까지 열려요. 볼살이 불독처럼 쳐져야 고놈 장군감이다. 자아알 생겼다. 대접받는 시대였죠. 보통의 아기들은 얼굴에 버짐도 잘 피고, 손발도 잘 트는 꾀죄죄한 아기였죠.
2. 놀이터 그네 쟁탈전
지금은 놀이터 그네마다 텅텅 비어 있더군요. 우리 땐 치열했어요. 얌체들이 그네에서 내려올 생각을 안 하면 싸움이 벌어졌죠. 줄을 섰어요. 내 앞에 세 명, 네 명. 그 아이들이 다 타야 내 차례가 됐죠. 효율적으로 즐기려면 빠른 시간 안에 최대치로 올라가야 했죠. 이렇게 올라가다가 그네를 한 번 감을 수도 있을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참 많은 애들이 그네에서 떨어졌죠. 저도 착지하다가 등으로 떨어져서 숨 넘어갈 뻔했네요. 숨이 안 쉬어지더라고요.
3. 인파에 깔려 죽는 날, 어린이날 놀이 공원
지금의 창경궁이 그땐 창경원이었어요. 놀이 기구들도 많았죠. 5월 5일 어린이날은 놀이기구가 무료였어요. 우리 어머니가 어떤 어머니인데요. 그 기회를 놓치실 리 없죠. 시골에서 올라온 이모 둘까지 대동하고 창경원으로 향해요. 막내 이모 역시 국민학생이었어요. 한 해 백만 명씩 태어난 천만 명의 어린이들이 있던 시대였죠. 네, 우린 단 한 개의 놀이기구도 타지 못 했어요. 어머니는 케이블카는 꼭 타야 한다셨죠. 우리의 유일한 희망 케이블카는 어마어마한 인파를 뚫고 다니다가 시들해져요. 집으로 돌아왔죠. 놀이기구 하나 타지 못한 어린이날이었어요.
4. 오전반, 오후반. 가방 하나로 남매가 나눠 쓰기
인구는 많고, 교실은 부족하니까 오전반, 오후반이 있었죠. 한 교실을 두 학급이 쓰는 셈이었죠. 우리 반 아이가 자기 누나에게 가방을 받아서 보자기에 있던 책들을 옮기는 걸 목격한 거예요. 철없던 저는 얼레리 꼴레리, 여자 가방을 쓴대요. 놀렸죠. 이 아이가 울면서 집으로 가는 거예요. 저는 저대로 충격을 받았죠. 그렇게까지 큰 상처인 줄 몰랐던 저는 진심으로 반성을 해요. 각자에게 다가오는 상처의 무게는 다르다. 누군가의 약점을 재미로 삼지 말라. 40년 지난 일이 이리도 생생해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서 철이 들어요. 가난이 참 흔했던 시대였네요.
5. 한 학년이 천 명이면 생기는 일
한 학년 당 천 명. 전교생 3천 명. 그런 중학교가 흔했어요. 교실 정원은 기본이 60명이었고, 70명인 반도 있었죠. 교실 맨 뒤에 의자가 닿아요. 그렇게 다닥다닥 앉아서 수업을 들어요. 선생님과 학생이 의견을 나누는 쌍방 교육은 아예 불가능했죠. 뒷자리에는 껄렁한 아이들이 많았어요. 당시 일진들은 담배는 기본이고 부탄가스, 본드까지 흡입했죠. 그래도 교권이 무너지지는 않아서, 선생님에게 폭력으로 맞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때리면 맞고, 양아치 짓은 또래들에게만. 그 선을 넘지는 않았죠. 그래서 선생님들이 그리 당당하게 아이들을 팼나 봐요. 구타가 참 흔했어요. 저도 마대자루가 부러지도록 맞았 ㅠㅠ. 학생이 너무 많아서였을까요? 사람이 귀하지 않아서였을까요? 점심시간 매점에서 조금이라도 일찍 먹겠다고 전력을 다해 뛰어요. 그래도 백 명 이상이 줄을 서 있죠. 그깟 단무지가 뭐라고, 한 학년 선배들이 다 뺏어가고. 지금 생각해도 더럽게 맛없는 국수였어요. 추억 보정이 불가능한 맛.
6.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고 싶어요. 엉엉
중3 때 원서를 쓰잖아요. 저는 수유중학교를 나왔는데 반에서 30등 안에 들어야 인문계 원서를 쓸 수 있었어요. 내로라하는 실업계 고등학교는 반에서 10등은 해야 했죠. 그때 여자 상업고등학교는 연합고사 200점 만점에 180점은 맞아야 안정권이었죠. 우리 아들 인문계 고등학교 원서 좀 쓰게 해 달라고 비는 부모님들도 많았죠. 우리 때는 서울 기준 남자는 200점 만점에 140점, 여자는 145점이 연합고사 커트라인이었어요. 고등학교에 들어갔더니 190점 이상이 한 반에 열 명 정도 되더군요.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2부제가 있었어요. 야간에 등교하는 '야간고' 학생이었던 거죠. 성적이 안 된다는 이유로 깜깜한 밤에 수업을 듣는다는 게 지금 생각하니 참 가혹하네요.
7. 못 찾겠다. 미달학과
대입은 말 그대로 전쟁이죠. 재수생, 삼수생까지 더해지니까 환장하죠. 대학생 되는 것 자체가 어려웠어요. 어떤 학교든 합격만 하고 보자.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학교의 경쟁률이 수십대 1이었어요. 가뭄에 콩 나듯 미달학과가 한두 개는 나왔어요. 주로 좋은 학교였조. 사람들이 졸아서 원서 자체를 못 낸 학교요. 백 프로 합격인 거죠. 선지원 후시험이었으니까요. 날로 먹게 되는 거죠. 그런 확률이 복권 당첨만큼이나 희박했죠. 저는 재수를 했어요. 재수학원도 지옥 그 자체였죠. 120명의 수강생이 같은 교실에서 뜨끈한 체온을 함부로 발산하는 열기가 괴롭기만 했죠. 에어컨이 있었는데, 전기세 아낀다고 잘 안 틀어줬어요. 맨 뒤에 앉은 친구들은 세숫대야에 물 받아놓고, 발 담드고 공부했죠. 그 형이 5수생인가 그랬는데, 결국 한의대 합격했어요. 제가 공부하던 학원이 신설동에 있었는데, 봄날 고대생들이 깃발 펄럭이며 MT 가는 풍경을 창밖으로 바라만 봐야 했죠. 좋겠다. 개X끼들아. 쌍욕이라도 해야죠. 화병나 죽게 생겼는데요. 얼마나 부럽던지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우리는 평생 뭐가 가장 후회될까요? 그런 질문을 하며 하루를 써요. 아직 답은 찾지 못했지만, 글이라도 써 두려고요. 후회가 좀 덜 될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