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경 누님이 신경 쓸까 봐 말 안 했는데 사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묵었다. 지인들이 많은데, 맘 편히 재워달라기는 어렵다.
컵스에프비(Cups FB)
에어비엔비로 찾았다. 1층은 칵테일 바, 2층은 게스트 하우스다. 손님방 하나. 사장님 방 하나, 바텐더 방 하나. 내가 최초의 남자 손님이다. 아침엔 씨저샐러드에 브리오슈 빵, 컵케이크까지 줬다. 1박에 38,000원인데, 많이도 챙겨준다. 사장님이 직접 구운 컵케이크가 맛있어서 놀랐다. 컵케이크 맛있기가 세상 어렵다. 푸석푸석, 평범하고, 싼 맛이 나는 비싼 과자다. 그걸 촉촉하게 구워내는 능력자다. 레게머리의 스타일리시한 중년인데 다트를 하자며 안 쓰던 안경을 찾더라. 다트가 꽂히면 어떻게 뺄지도 모르는 나를 그렇게라도 이겨먹어야 했을까? 나는 2층 단 하나의 방에 홀딱 반하고 만다. 특히 단단한 소파형 침대, 밝고 평범한 방, 발뮤다 커피 포트, 두 개의 화장실, 히비스커스 티가 좋았다. 가전제품들이 작고 예뻤다. 1박이 2박으로 늘어났다. 약간 장사가 안 되는 곳의, 무기력한 평화로움이, 호감으로 다가왔다. 사장님께는 좀 죄송하지만.
일요일은 원래 문을 안 여는데, 한 잔 하라며 나를 꼬드겼다. 바텐더 앤드류는 무려 비보이 출신. 청주, 광주, 서울, 부산이 섞인 불나방 떠돌이. 아주 맛있는 하이볼을 말아줬다. 끝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한 잔 하라는 말에 하이볼을 홀짝. 호주 브리즈번에서 살다 온 사장님은 소갈빗살에 바비큐 소스를 뿌려서 내왔다. 고기는 아주 맛있지만, 양념이 겉돈다고 했다. 진심을 다해 지적질하는 나는 언젠가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이 가게가 손님으로 미여 터질까? 함께 고민했다. 대학가도 아니다. 번화가도 아니다. 망미동에서 그래도 알려진 카페거리, 망리단과도 멀다. 여기만 보고 찾아와야 한다. 감바스(올리브 오일에 지글지글 새우를 끓인 요리), 샥슈카(토마토 소스 보글보글, 계란 풍덩 요리)를 안주로 추천했다. 가장 잘 나가는 건 그나마 피자라고 했다. 감바스와 샥슈카는 너무 세련된 메뉴라고 했다. 그럼 꼭 붙어있는 샵파크리치 아파트 주민을 꼬셔야 한다. 어떻게? 신뢰로, 사랑으로 천천히. 한 번 들른 손님이 또 오도록. 모든 고민이 억울해졌다. 국영수 중심, 예습 복습 철저히. 이거만 하면 서울대 누구나 간다. 몇 년 후에 이 가게가 이 이름 그대로 아파트 손님으로 바글댄다면, 울어버릴 것이다. 망미역 8번 출구 컵스에프비. 저녁에 연다. 일요일은 쉰다.
둘은 내가 동의하지도 않았는데 다트 기계에 삼천 원을 넣었다. 내가 꼴찌일 걸 알면서도, 최선을 다하더라. 사장님에게 내내 이기다가 막판에 역전패했다. 안경 쓰는 사람인 걸 그때 알았다. 아니, 안 쓰던 안경을 나처럼 하찮은 초짜 이겨보려고 굳이 찾는다. 이런 여행이기를 누구나 바란다. 모르는데, 모르지 않게 된다. 평생 다시 볼 일 없다. 대부분은. 그래서 약간의 저릿함.
숙경 누님의 남동생을 드디어 만난 날이기도 하다. 오시게 양식당. 부 곡시장 소문난 맛집. 3년 전인가? 남동생이 부산에서 식당을 연다고 했다. 말은 안 했지만, 고만고만한 프랜차이즈겠지. 곧 망하겠지. 나는 무례하게 흘려들었다. 예약을 해야 하는 부곡동의 명물이 됐다. 알고 보니 청담동을 주름잡던 이탈리아 레스토랑 안토니오의 수석 셰프. 어떻게 식당 이름을 오시게로 지었을까? 이리 오시게. 안녕히 가시게. 청학동풍의 구수한 이름, 메뉴는 이탈리아. 개구쟁이처럼 짓궂고, 맘대로다. 작은 실내도 이름처럼 엉뚱하고, 신선하다. 친동생 식당인데도 예약을 해야 한다. 무뚝뚝한 원칙주의자, 부산 싸나이를 떠올렸다. 자신의 카메라 울렁증을 함께 고민하는 사이가 될 줄 꿈에도 몰랐다. 우선 먹었던 메뉴들은 끄덕끄덕. 빈틈없이, 군기 바짝. 뭐 더하고, 뺄 거 없는 맛이었다.
근처에 한국식 베트남 국수 '기찰'을 하나 더 열었다. 멀쩡한 테이블은 단 두 개. 나머지는 벽 쪽에 처박혀서 먹어야 하는 작고 작은 가게였다. 소뼈를 푹 고아서 만든 깊은 국물에 쌀국수를 뚝배기에 담아서 낸다. 베트남에선 볼 수 없는 베트남 쌀국수다. 공황 장애로 베트남에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다. 베트남에는 없는 베트남 맛이다. 실내에선 배호의 중저음 트로트가 흘러나온다. 대부분 배호를 모를 것이다. 우리 어머니에게 최고의 목소리다. 그깟 나훈아, 그깟 남진이다.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이 대표곡이다. 어리둥절, 이해 못하는 손님이 사장님의 흐뭇 포인트. 기찰 국수는 흐린 날씨와 무관하게 경쾌하다. 베트남 커피 쓰어다도 함께 팔면 어떨까 싶다. 작심하고 살을 빼려고 다이어트 중인데 주말은 치팅데이. 마음껏 먹어도 된다. 토요일에 콜라에 족발 절반, 일요일 아침에 나머지 절반을 먹었다. 토요일 밤에 혼자 콜라에 족발을 먹는 남자면 내겐 연예인이다. 재밌고, 좀 헐렁해 보인다. 청담동에서 일할 땐 접시가 더러우면 다 깨부수었다. 손바닥에선 피가 줄줄. 청담동 안토니오 군기반장. 지금 가장 무서운 건 카메라. 카메라만 돌아가면 침만 꼴깍꼴깍. 그래서 유투버가 되지 못하고 있다. 아니, 그 아까운 재능을 왜 썩히세요. 최초의 카메라 울렁증 셰프로 거듭나세요. 나의 조언이 이 남자의 뇌를 관통한다. 찌릿찌릿. 이제 마음껏 울렁울렁해도 된다. 숙경 누님을 통해 알게 됐지만, 누님이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만났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꼴통스러움이다. 파격적이고, 천진하다. 그래도 맛은 완벽해야 하고, 식당은 재밌어야 한다. 모차르트가 살짝 겹쳐 보인다. 사장님 힘내이소. 세상이 더 재밌어져야지예.
부산에 오기까지는 그렇게 두렵더니, 푹 잠겨서는 발이 안 떨어진다. 숙경이 누나는 정은이까지 불렀다. 십 년 전 홍대에 살던 정은이. 지금은 두 딸의 엄마. 요즘 핫한 여행 프로그램 트래블러에 나온 일란이 얘기도 했다. 쿠바에서 류준열을 만난 일란이. 내 책이 인연이 됐다. 이젠 나 없이, 각자가 연락하는 사이. 나는 글을 쓰기만 했다. 글이 살아서 사람들을 모았다. 그러니까 나는 써야 한다. 쓰고, 흐르는 물에 조심히 내려놓는다. 흐르고, 닿는다. 닿은 곳에서 머물고, 죽는다. 어떻게 하면 모든 힘을 빼고, 가만히 놓을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볼링공도 그렇게 놓아야 한다. 다트도 마찬가지. 나를 이겨야 했던 망미동 컵스에프비 사장님, 두고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