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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Aug 21. 2020

파란만장 나의 라면 역사

일생을 라면과 함께 살았더군요

라면처럼 맛있는 음식이 있을까 싶어요. 제가 지금은 역류성 식도염을 앓고 있어서 밀가루 음식은 가뭄에 콩 나듯이 먹어요. 라면을 먹어도 금세 배가 꺼지던 청춘의 시절이 그립네요. 저를 사로잡았던 라면의 역사를 풉니다.


엄마 라면, 삼양 라면

1980년대 초반까지 라면은 무조건 삼양라면이었죠. 지금처럼 싸고 만만한 음식까지는 아니었어요. 82년에 100원을 돌파하는데, 당시 짜장면 가격이 4백 원. 요즘 짜장면 가격이 6,714원(구글 검색 2018년 기준)이래요.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한 봉지에 천오백 원 이상이 되는 거죠. 먹을 게 없고, 돈이 없어서 먹는 음식이라기보다는 특별한 별미에 가까웠죠. 어머니가 라면을 끓이면, 약간은 잔칫집 분위기가 났어요.


우라지게 안 익는 너구리


너구리 하면 다들 다시마 이야기만 하죠. 저는 면발이 그렇게 속을 썩이더군요. 끓여도 끓여도 안 익어요. 보통 라면의 두 배는 끓여야 익는 것 같더군요. 삼양라면으로 굳어진 입맛에 가히 혁명적인 고급 맛이었죠. 아니 라면에서 이런 깊은 해물맛이 날 수도 있는 건가? 너구리는 비싼 라면이라 자주는 못 먹었어요. 그때는 십 원, 이십 원 차이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으니까요.


공포의 푸르둥둥 국물, 팔도 클로렐라 면

팔도 클로렐라면은 국물이 파랬어요. 오래된 연못이나 웅덩이가 떠오르더군요. 죽은 처녀 귀신도 국물에서 나올 것만 같았죠. 건강에 좋다는 건 제가 알바 아니고요. 그 색을 감당할 수가 없겠더군요. 야쿠르트 아주머니는 거의 움직이는 편의점이었죠. 야쿠르트에 라면까지 팔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라면계의 혁명, 라면계의 아이폰 팔도 비빔면

지금도 팔도 비빔면이 라면 중에 제일 맛있어요. 새로 나온 비빔면들도 다 먹어 봤는데, 팔도 비빔면을 못 놓겠더라고요. 어떻게 봉지 라면이 사 먹는 면요리보다 맛있을 수가 있지? 처음 팔도 라면은 충격 그 자체였죠. 물론 제 초딩 입맛 기준으로요. 짜파게티는 짜장면보다 낫다고 하기엔 모호한 면이 있거든요. 애초에 많이 다른 맛이죠. 당시 비빔냉면 중에 팔도 비빔면보다 확실히 맛있다. 그런 비빔냉면이나 쫄면이 없었어요. 사치스럽게 사과 과즙까지 들어간 비빔면 페이스트는 아이폰에 버금가는 혁명이었죠. 왼손으로 비비고, 오른손으로 비비고, 두 손으로 비벼도 되잖아. 이런 근본 없는 광고 카피도 맛있으면 다 용서되더라고요. 세상에서 제일 이해가 안 가는 사람 비빔면 하나만 끓여 먹는 사람. 더 이해가 안 되는 사람, 두 개가 배 부르다고 남기는 사람.


더럽게 양이 많아, 청보 곱빼기 라면

당시 최고의 코미디언 이주일이 모델이었죠. 진짜로 두 배 양은 아니었고, 보통 라면보다 30% 정도 양이 많았어요. 그래도 엄청 많게 느껴진 이유가 맛이 더럽게 없어서였죠. 하나를 끓여도 다 먹기가 힘든 유일한 라면이었어요. 양은 확실히 많구나. 먹어도 먹어도 안 주는 신비의 라면이었죠. 저에겐 인생 라면이었네요. 이보다 맛없는 라면이 있었나 싶네요.


스프가 두 개, 삼양 라또마니

생각해 보니까 곱빼기 라면에 버금가는 라면이 있기는 했네요. 코미디언 이용식이 광고한 라또마니. 라면 또 많이 많이의 준말 라또마니. 별첨 스프의 시초가 바로 이 라면이었죠. 얼마나 신선한 발상이었는지 몰라요. 굳이 스프 하나를 따로 더 주다니. 두 개의 스프에 홀려서 여러 번 먹었는데, 결국 그 어린 나이에 이 라면은 맛이 더럽게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돼요. 하나로 합쳐도 되는데, 두 개로 분리한 것에 불과하다는 결론까지 다다르죠. 그때는 스프 봉지를 쏟아서, 일일이 분석할 정도의 시간이 제겐 있었거든요.


국민을 우롱한 라면 빙그레 이라면

트로트 가수 주현미가 광고했죠. 전 국민 라면 이름 공모 프로젝트였어요. 일단은 '이라면'으로 출시하지만, 공모전에서 1등한 이름으로 개명을 약속했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겠어요? 칼라 TV 하나 받으려고, 장충체육관을 가득 채우던 시대였는데요.  변웅전이 사회를 보던 명랑 운동회는 MBC에서 제작한 연예인 체육대회 프로그램이었어요. 거기 온 사람 중에 단 한 명이 칼라 TV를 받을 수 있었죠. 모두 입장권을 손에 쥐고, 제발 내 번호가 담청되기를. 아파트 한 채 당첨되는 것 이상의 횡재였죠. 라면 공모 상품이 뭔지는 기억 안 나지만,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작명에 참여해요. 그리고는 그냥 '이라면'으로 가겠대요. 장난하나요? 우리가 만만해요? 라면 맛은 괜찮았어요. 국물이 자작자작 적은 라면이었죠. 밥을 말지 말고, 비벼 먹어야 하는 라면이었죠. 그렇게 단명할 거면, 이름이라도 약속대로 개명을 했어야지. 맛이라면 이라면. 저는 멜로디도 외워요. 주현미의 간드러진 목소리도 다 기억나는군요.


라면 이야기를 괜히 시작했네요. 머릿속에 있는 라면만 해도 스무 종은 더 되네요. 심심할 때마다 야금야금 써야겠어요. 내 소중한 라면들을 소환해서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우리가 이 시점에 같은 지구에 있다는 게 결코 작은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반갑습니다. 지구별을 떠날 때까지 재미나게 살다가 가자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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