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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Aug 25. 2020

옛날의 겨울은 왜 그렇게 추웠을까요?

70,80의 겨울은 겨울밤이 유난히 길었어요 

80년대 한강( Media n 사진)

연탄, 번개탄, 석탄 난로, 아궁이, 곤로, 창호지, 외풍, 아랫목. 옛날의 겨울은 살을 찢는 맹추위였죠. 가난했으니까요. 집은 허술하고, 연탄 한 장도 아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약간의 온기에도 감격했더랬죠. 여름에 더 반가운 옛날의 겨울 이야기 


1. 전구를 안고 자 본 사람


저는 아니고요. TV 드라마에서 나온 장면이었어요.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을까? 천재다. 방이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추운 시대였죠. 입김이 나오는 건 기본이고요. 아침에 냉수 위로 살얼음이 얼 정도였죠. 겨울이 건조해서 마른기침을 하도 해대니까 어머니가 냉수를 방에다가 놔두셨거든요. 그게 어는 거예요. 방 안 기온이 영하였던 거죠. 믿어지세요? 


2. 영하 3도, 장작과 석탄을 받아 오너라 


영하 3도가 돼야 난로를 피울 수 있었죠. 당번(주번이라고도 했죠)은 석탄과 장작을 받아와야 했죠. 영하 3도에 고사리 손으로 양철 바구니를 들고 줄을 서요. 얇디얇은 실내화 사이로 발가락이 얼마나 시리겠어요? 석탄과 나무를 한가득 받아와서는 난로에 불을 지폈죠. 불은 선생님이 지펴 주셨어요. 


3. 입김 호호, 냉골 교실의 끔찍한 필기 촉감 


영하 2도까지는 난로를 피울 수 없는 냉골에서 공부를 해야 했죠. 차가운 공책에 차가운 연필로 한 자 한 자 써 내려갈 때 손으로 느껴지는 감촉이 끔찍했죠. 그 서늘한 촉감이 싫어서 장갑이라도 쓰면 글씨가 제대로 써져야 말이죠. 털이 수북한 귀마개가 꽤나 유용했어요. 어머니들은 늘 뜨개질을 하셨죠. 벙어리장갑과 목도리가 필수품이었으니까요. 앙고라 털실 4호였나? 국민 털실이었죠. 


4. 동상은 흔한 질환, 그래도 논다 


손발이 찬 저는 눈싸움을 하는 아이들이 신기하더군요. 처음엔 어울리는 게 좋아서 눈을 뭉치고 놀았지만, 손이 깨질 것 같은 거예요. 저 아이들은 손이 괜찮나? 젖은 장갑으로 어떻게 저렇게 재미나게 눈싸움을 하지? 그땐 동상 걸린 아이들이 정말 많았어요. 동상을 치료한다고 뜨거운 물, 찬물에 교차로 손을 담그기도 했고요. 다 탄 연탄재를 넣은 물에 손을 담그기도 했네요. 동상에 걸리면 너무너무 가려워요. 뚱뚱 부은 그 손으로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굴렸죠. 


5. 메밀묵, 찹쌀떡 꾀꼬리 아리아 


골목마다 메밀묵, 찹쌀떡을 외치는 소리가 겨울밤을 채웠죠. 주로 대학생 형들이 아르바이트로 찹쌀떡과 메밀묵을 팔았어요. 메밀묵과 찹쌀떡에 무슨 공통점이 있죠? 그걸 같이 먹은 기억은 없어요. 밤마다 그 소리가 들리면, 아주 가끔 어머니는 찹쌀떡을 사셨죠. 마침 눈이라도 내리면, 찹쌀떡이 눈가루에서 나온 것처럼 하얗기만 했어요. 나도 꼭 대학생이 돼서 찹쌀떡을 팔아야지. 대학생이 귀한 시대였으니까요. 어머니, 아버지 형제 통틀어서 딱 한 명이 대학생이었어요. 막내 외삼촌이었는데, 5수를 해서 외대에 들어갔죠. 찹쌀떡을 파는 형이 되러면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까? 목소리까지 그렇게 멋지게 들리더군요. 메밀묵, 찹쌀떡! 


6. 공포의 똥탑, 혹은 똥얼음 


70년대 말 삼양동은 서울에서도 가장 못 사는 동네였어요. 외갓집이 삼양동 꼭대기에 있었죠. 대한민국 하위 1% 빈민촌이었죠. 당연히 푸세식 화장실인데, 똥차가 겨울에는 빙판길을 못 올라와요. 똥은 계속 쌓이지, 똥차는 못 올라오지. 여러분은 똥탑을 보신 적 있나요? 차곡차곡 쌓이고 얼면 원뿔형의 똥탑이 돼요. 거의 서서 똥을 눌 수밖에 없었죠. 외갓집에 갈 때마다 변소가 그렇게 싫더라고요. 꼿꼿하게 언 다부진 똥탑. 나프탈렌 향이 워낙 강해서 악취까지는 아니었네요. 그나마! 


7. 우리의 소중한 빙판, 못 잃어 


빙판길은 우리에겐 놀이터였죠. 집에서 만든 각자의 썰매가 있었어요. 쇠꼬챙이를 폴대 삼아서 영차영차 눈길, 빙판길을 지쳤죠. 비료 봉지나 비닐봉지를 깔고 내려오기도 했고요. 사고 난다면서 어른들이 연탄재를 부셔서 빙판을 다 망쳐 놓는 거예요. 조심조심 다니면 되지. 넘어져서 뼈 부러진다고 죽는 거 아니잖아요? 우리는 빙판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몰라요. 겨울은 늘 가혹했고, 우리는 가혹함을 견디고, 피하면서 꾸역꾸역 봄을 기다렸죠. 봄이 되어서야 녹아내리는 구정물로 거리는 진창이었죠. 사실 겨울은 더럽고, 흉측했어요. 그래도 그 혹독함의 힘으로 봄이 왔어요. 봄의 마법은, 겨울의 저주와 한쌍이어야 했죠. 언 소주병을 깨뜨리던 MBC 뉴스 데스크 리포터도 기억에 남네요. 소주가 그렇게 쉽게 얼 수도 있었어요. 그때는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아주 작은 추억들도 끄집어내서, 세상 속에서 빛을 쪼여주고 싶어요. 우리의 흔적이, 미래의 누군가에겐 새로운 재믹 될 수도 있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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