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고요?
대신 몇 가지 조항이 있어요. 선물은 안 돼요. 저축도 안 되고, 집을 사는 것도 안 돼요. 무조건 써야 해요. 자기를 위해 시계나 백을 사는 건 괜찮아요. 저는 시계도, 백도 관심 없어요. 운전면허도 없으니 차 역시 그림의 떡이죠. 결국 먹고, 자는데 돈을 써야 해요. 일주일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제주도를 갈까요? 말까요? 서울에만 있는 게 나을까요? 간단치가 않죠? 동선이 갑자기 중요해졌어요. 돈을 쓰고 싶어 죽겠는데, 비행기나 기차에 갇혀 있어야 해요. 이런 낭비가 없죠. 그래서 서울에 있기로 합니다. 돈을 쓰기에는 서울 만한 곳이 없으니까요.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이라고 해봤자 80만 원이 채 안 되는군요. 6박 7일 해봤자 오백만 원도 안 되네요? 그렇게 저렴한데 조식에 라운지 음식까지 퍼주는군요. 갑자기 또 짜증이 확 나는 게 조식이네요. 어쩔 수 없이 호텔에서 먹어야 해요. 이삼십만 원 하는 아침밥 좀 먹어보려고 했더니 아침 일곱 시에는 '급'이 있는 식당이 전멸이군요. 돈을 쓰겠다는데 다들 게을러 빠져서 점심 장사부터 하는 거예요. 환장하겠네요. 어쩔 수 없이 조식도 호텔에서 먹어야 해요. 아침 일곱 시에 최고급 음식은 호텔 조식뿐인 거죠. 조식 포함에 감격하는 가난뱅이들과 섞여서 밥을 먹어야 하는군요. 제기랄!
호텔은 시그니엘 3박, 포시즌스 호텔 3박으로 해야겠어요. 그나마 80만 원 근처더라고요. 신라 호텔은 50만 원대더군요. 신라 호텔이면 삼성 계열 아닌가요? 최고 중의 최고인 줄 알았는데, 좀 좋은 모텔 정도네요. 트레이닝팬츠에 아디다스 삼선 슬리퍼 질질 끌고 가는 곳이었군요. 호텔들이 잠만 재워주면 되지, 라운지 서비스에 마사지 할인에 뭔 특혜를 줄줄이 얹어 주나요? 거지들만 상대했나 봐요. 제발 뭐 좀 더 주고, 어메니티 바리바리 싸주고 그러지 좀 않았으면 좋겠어요. 원래 취향은 느긋하게 책이나 읽고 뒹구는 건데요. 일이 생겼잖아요. 1억을 펑펑 써야 하잖아요. 아, 맞다. 최고급 마사지를 받아 보겠습니다. 이왕이면 삐뚤어진 척추도 교정해 주는 신의 손이었으면 해요. 최고급 호텔 기준 두 시간에 30만 원 정도로군요. 호텔 마사지니까 당연히 좋겠죠.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프랜차이즈 느낌 안 나나요? 제일 맛있는 짜장면이 호텔 짜장면이 아니듯이요. 불맛 손맛 제대로 나는 곳은 허름한 골목의 면발 도사들이잖아요. 삼십만 원 마사지받으면서 아로마 오일에 음악 은은하게 깔고 깔짝깔짝 그럴 거면 안 받을래요. 뼈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면서 얼굴 비대칭이 교정되고, 묵은 변비가 쑥 내려가는 그런 곳에서 받고 싶습니다. 교통 체증이 또 걱정이네요. 있는 건 돈뿐인데 시간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잖아요. 뉴욕은 헬기 택시가 있거든요. 편도 이십만 원 정도니까 저렴하고 얼마나 좋아요. 왜 우리나라에는 헬기 택시가 없는 걸까요? 차라도 막히면 있는 건 돈 뿐인 부자가 지하철을 타야 해요? 그 방법이 최선인가요? 아무리 용한 신의 손이어도 멀면 못 가겠네요. 돈 쓸 시간도 없는데 길에서 시간을 허비해서야 되겠어요?
일식은 제일 비싸다는 청담동 코지마가 저녁에 35만 원 정도군요. 오마카세의 단점이 뭐냐면요. 뜸을 들인다는 거예요. 자존심 알겠고, 음식에 영혼을 담는 것도 알겠는데요. 제가 한 끼로 35만 원짜리 두 번 먹어야 하는 사람이거든요. 코딱지 만한 접시 하나 끝나면 하나, 이런 식으로 감질나게 하지 마시고요. 조르르 일렬로 음식을 줄 세워서 한꺼번에 주세요. 그렇게는 못 판다고요? 손님이 사정이 있으면 굽힐 줄도 알아야지. 35만 원짜리에 백만 원 낼게요. 아, 절대로 배는 부르면 안 돼요. 그러니까 모든 음식은 평균의 절반 크기에 동일한 재료와 비율로 유지해 주세요. 그게 뭐가 어렵다고, 또 안 된다는 거요? 그렇게 재료가 축소되면, 애초에 의도했던 맛이 안 난다고요? 알았다고요. 그 맛 안 나와도 되니까 해달라는 대로 해달라고요오오오.
휴우우. 하루 천만 원 쓰기가 이리 어려운 거였어요. 상상만 하는 건데도 지치네요. 돈이 억수로 많다는 것 자체가 행복은 아니군요. 평생 써도 못 쓰는 돈이 있는 사람을 부러워만 할 게 아니네요. 상상만 해도 좋아야 하잖아요. 상상만으로도 기가 빨리네요. 부자의 하루를 상상했더니 진라면이 왜 이리 먹고 싶은 걸까요? 그렇게 싸구려로 배 채우면, 다음날 만찬을 또 어찌 감당하려고요? 네, 지금 저는 전 재산 200만 원인 거지 작가예요. 없이 살아서 그런가 봐요. 갤러리아 백화점 VVIP들은 그깟 1억 하루에도 쓴다며 답답해하겠죠. 그래서 다 자기에게 맞는 삶이 있나 봐요. 2천 원 쌀국수를 내가 원하는 속도로 깨작깨작 먹을래요. 이제야 좀 숨이 쉬어지네요. 너무 많은 돈은 제가 거절하겠습니다. 강조합니다. 제가 거절하는 겁니다만.
PS 매일 글을 씁니다. 작은 의미, 작은 재미면 충분합니다. 너무 거창하고, 거대하고, 깊이를 강요하는 세상에서 작은 쉼이 되고 싶습니다. 반갑습니다. 꾸벅
https://brunch.co.kr/@modiano99/7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