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하나로 성질 버린 날

by 박민우

하루는 오전과 오후 두 개로 쪼개서 써야 해요. 두 배로 사는 지혜죠. 저처럼 글만 쓰는 사람이 백수가 아님을 증명하려면, 스스로에게 엄격해야 해요. 오전에는 운동을 하려고요. 매일 브런치(네이버 블로그에도 올려요)에 올리는 글까지. 딱 두 개만 끝내고 쉬기.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사용해야죠. 보상이 있어야 의욕도 생기는 법이니까요. 아침을 먹고 나니까 졸음이 오네요? 어제 새벽 두 시에 잤거든요. 삼십 분만 자면 개운해질 텐데, 무조건 참는 게 능사는 아니죠. 삼십 분 후에 눈을 떴어요. 잠을 정리하는 수순으로 잠시 다시 감았는데, 오전 열한 시라뇨? 낮잠을 세 시간을 자다뇨? 저를 죽여요? 살려요? 이런 게으름뱅이는 산소도 아깝죠. 하루를 두 개로 쪼개서 쓰라고 했더니, 잠을 두 번 쪼개서 제대로 자는군요. 후회를 해서 뭐하겠어요? 오전히 날아갔으면 오후를 제대로 보내면 되죠.


맨 몸 스쾃 천 개


를 하기로 합니다. 못 할 것 같죠? 얼마 전에 제가 4백 개를 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것도 힙업 밴드를 무릎에 걸치고요. 힙업 밴드 없이 하는 거랑 비교하면 1.5배는 더 힘들어요. 얼추 맨몸 스쾃 6백 개를 한 셈이죠. 삼십 개도 한 번에 못 했던 걸 생각하면 놀라운 발전이죠. 인간의 몸이 이렇게나 위대해요. 오늘 저는 꼭 천 개를 하겠습니다. 천 개 도전 유튜브 영상을 틀어 놓고 자세를 잡아요. 쉽게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꼭 해내겠다는 마음이 기적을 만들어줄 테니까요. 선풍기를 몸에 밀착시켜요. 땀으로 온몸이 젖을 테니까요. 잠깐, 잠깐. 무릎이 시큰거리네요. 125개에서 멈춰요. 욕심도 몸 봐가면서 부려야죠. 무릎은 한 번 나가면 회복도 안 되더라고요. 그래요. 오늘 하루는 공치는 분위기입니다. 인정합니다. 저는 패배자입니다. 답답하니까 어디라도 나가고 싶지만 저에게 싱은 없어요. 좁은 방에 갇혀서 방청소나 하고, 새들이 둥지를 틀려고 쌓아놓은 베란다 나뭇가지나 제거해야죠. 집 앞 마트에 가서 레몬이나 몇 개 사 오려고요. 잠깐 콧바람은 쐐도 되잖아요? 제가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요. 조금만 더 걸으면 MAKRO라는 마트가 있어요. 우리나라로 치면 식자재 마트 같은 곳이라 죄다 싸요. 노랗고 큰 레몬 있잖아요. 하나 살 돈으로 MAKRO에서는 다섯 개를 산다니까요. 아침마다 꿀이랑 레몬즙 휘휘 저어서 차로 마시면, 몸이 한결 가볍더라고요.


평일 낮인데도 사람이 왜 이리 많나요? 월급 주간이거든요. 태국은 매달 말에 거의 모든 회사가 월급을 줘요. 쓰고 보자, 먹고 보자. 마트 건, 식당이건 바글바글해요. 개미와 베짱이의 베짱이가 사는 나라가 태국이라니까요. 저는 레몬만 사면 돼요. 그런데 한 여자가 매대에 엉덩이까지 걸치고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봉지에 담아요. 이 여자 전에 한 남자가 레몬을 몇 개 샀고, 여자는 기다리더라고요. 타인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다. 마음껏 고르라는 나름의 배려였죠. 저도 질 수 없죠. 그래서 그녀가 마음 편히 고르라고 마트를 천천히 돌다 와요. 시간아 가라. 최소 5분은 더 지났을 거예요. 여자가 계속 레몬을 뒤적이면서 들었다 놨다를 하고 있네요. 후우우, 하아아. 심호흡, 심호흡. 태국 방콕에서 십일 년째 살고 있다고요. 한국에서는 늘 쫓기는 기분이 들었어요. 태국의 느긋함에 반했죠. 혜택을 받았으니, 저도 선한 영향력을 행사해야죠. 저도 태국 사람 못지않게 배려하고, 느긋한 사람이고 싶다고요. 그런데 이 여자가 저를 시험에 들게 하는군요. 스무 개에서 스물한 개를 그따위 신중함으로 고르고 있는데 피가 거꾸로 솟더군요. 비닐봉지를 들고 그녀 옆에 바짝 붙어서 그녀가 탈락시킨 레몬 위주로 여섯 개를 담아요. 그 속도에는 짜증을 가득 담았죠. 당신이 탈락시킨 쓰레기 레몬, 내가 화끈하게 다 먹어주마. 그녀는 깜짝 놀라서 저를 한참 보더군요. 약간 통쾌하고 내내 후회뿐이네요. 이런 일로도 저를 못 다스리네요. 11년 헛살았어요. 방에 돌아와서 명상 음악을 틀어요. 내 기준으로 살지 않는 사람, 내가 생각하는 속도로 살지 않는 사람에게 관대해지기. 명상을 아무리 해도 저는 더 기다리는 짓은 못 해요. 그게 말이 되냐고요. 그녀도 자신의 이기적인 행동을 돌아봐야죠. 애초에 그렇게 기다려줄 필요가 없었어요. 배려랍시고 내 안의 욕망을 무시한 게 화근이었죠. 명상이 이래서 좋다니까요. 뭔가는 건지게 해 줘요. 스스로가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배려는 하지 말 것. 남을 돌보는 것만큼이나 나를 돌보는 것도 중요하고 중요한 것. 그냥 같이 레몬을 고르면 됐던 건데요. 내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하루였지만, 마지막에 찾아온 지혜는 마음에 드는군요.


앞으로 더 훌륭해질 거라고 다짐하는 대신,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음을 명심 하려고요. 저는 얄팍한 사람입니다. 약간은 더 지혜로워진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마음 편히 잠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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