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찌개가 우선 떠오르네요
미국의 사형수들은 마지막 한 끼를 주문할 수 있죠. 프렌치프라이와 닭튀김, 빵이 가장 많이 선택되더군요. 아이스크림도 많이 보이고요. 사과 한 알, 올리브 한 알처럼 특이한 한 끼도 있더군요. 사람을 죽인 나는 먹을 자격도 없다. 빈속으로 사형장으로 가는 사형수도 많았다고 해요.
딱 한 끼만 먹을 수 있다는 극단적 상황에서 먼저 떠오르는 메뉴가 궁금하더라고요. 한국 음식이 가장 좋지만, 태국, 베트남 음식도 못지않게 맛있어요. 중국 음식도 좋아하고요. 그래도 한국 음식이 주로 떠오르더군요. 일단 김치찌개와 김치찜이 떠올라요. 김치가 들어가면 맛없을 수가 없죠(이상하게 김치 만두는 또 별로예요). 돼지고기가 충분히 들어간 뚝배기 김치찌개나 묵은지와 돼지고기로 뭉근하게 끓인 김치찜이 1순위네요. 잘 익은 김치는 상상만 해도 침샘이 바로 작동하네요. 정체성이 의심스러운 말랑말랑 김치를 쭉 찢어서 밥에 올리면, 크으으.
다음으로는 달걀말이가 떠올라요. 이 흔한 음식은 왜 언제나 맛있을까요? 사실 김치찌개와 달걀말이가 동시에 떠올라요. 세종문화회관 뒷골목 '광화문 집' 아시나요? 지금도 있나 모르겠네요. 아주 좁은 공간의 복층 식당인데요 김치찌개와 달걀말이가 대표 메뉴죠. 한 겨울 추위를 피해 식당으로 들어가면 안경에는 뽀얗게 김이 서리죠. 떠들썩함, 따뜻함에 김치찌개의 끓는 소리까지 혼을 쏙 빼놓죠. 돼지 고기가 듬뿍 들어간 찌개의 얼큰함, 달걀말이의 기름진 고소함이 천하를 지배하는 두 마리 용처럼 당당하죠. 조화는 서로 다른 성질의 만남임을 이 두 요리를 통해 배우게 되죠.
춘천 막국수 역시 제게는 최고의 한 끼죠. 이왕이면 소양강 댐 근처 '샘밭 막국수'로 하겠습니다. 너무 오래전에 먹어서 가물가물한데도 충격적으로 맛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해요. 막국수라는 어감 자체는 우악스럽잖아요. 막 만들어서, 막 먹어야 할 것 같은. 그런데 샘밭 막국수에선 기품이 느껴지더라고요. 삼삼한데 맹탕의 삼삼함이 아니었어요. 초저온으로 48시간 육수를 우리면 이런 맛일까요? 초계 국수나 김치말이 국수도 떠오르네요. 마지막 딱 한 끼로는 좀 아쉽지 않나 싶으면서도, 이보다 더 맛있는 게 딱히 안 떠오르니까요. 더 비싼 평양냉면보다 저는 막국수, 밀면파예요. 열심히 먹다 보면 평양냉면의 깊이에 눈이 확 떠진다는데,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나 봐요.
비비고 만두 세 개가 들어간 진라면 매운맛도 끌리네요. 비비고 고기만두 세 개에 진라면 한 봉지, 그리고 달걀 하나를 거의 다 익은 시점에서 퐁당. 달걀노른자는 살아남아야 하고, 면을 중간쯤 먹었을 때 터뜨려서 면발과 비벼야죠. 이 요리의 장점은 클라이막스가 여러 번이라는 거죠. 만두의 배를 가를 때마다 만두소의 조화로운 향이 훅 들어올 테니까요. 국물에서 한 번, 면발에서 한 번, 달걀에서 한 번, 만두는 세 개니까 세 번. 여러 번의 즐거움이 폭죽처럼 터지는 요리가 되는 거죠. 라면에 랍스터나 왕새우를 넣는 것도 생각해 봤어요. 아니요. 만두가 최고죠. 요즘엔 풀무원 얄피 만두가 그렇게 맛있다면서요? 한국 가면 비비고 만두와 얄피 만두, 고향 만두, 동원 개성 만두 중에 시그니처를 모두 먹어보려고요. 만두건 라면이건 왜 이렇게 종류가 많아졌나요? 그래서 너무 좋다고요.
국물 떡볶이와 김말이 튀김도 다시 먹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슬퍼지네요. 흥건한 조스 떡볶이 정도면 돼요. 깨끗한 기름으로 튀긴 튀김들을 퐁퐁 담가서 바삭 씹는 거죠. 매운 건 사실 맛이 아니라 자극이잖아요. 그런데 그 자극은 도대체가 끊을 수가 없어요. 결국엔 괴롭히는 맛 아닌가요? 여우 같은 설탕의 교란이 없었다면 떡볶이가 사무치게 맛있을 리 없죠. 떡볶이와 어묵이 반반인 국물 떡볶이에, 고구마튀김은 빼고 나머지(채소 튀김, 김말이 튀김, 오징어 튀김)를 먹고 싶네요.
신기하죠? 랍스터나 스테이크, 초밥, 한정식 등이 왜 우선순위가 아닐까요? 그걸 마지막 한 끼로 먹고 싶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익숙함 속에서 끝내 살아남은 것들이 결국 최고인가 봐요. 우리가 소유하고자 하는 가치들은 특이하거나 비싼 게 많죠? 돌고 돌면 결국 이미 가진 것들이 더 고맙고, 소중해질 것 같지 않나요? 아, 맞다. 여기에 조청 유과를 후식으로 씹어 주면 완벽한 꿈의 한 끼입니다. 저는 태국 방콕에 있어요. 지금 저 메뉴들을 드실 수 있는 여러분들이 부럽습니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여러분의 24시간이 저로 인해 조금은 맛깔난 24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 글이 참기름이나 맛소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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