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생, 나이가 깡패인 대한민국의 개족보 원흉

한 살 위아래가 이리도 치명적인 유일한 나라

by 박민우
20200925_162519.jpg 태국 난에서 마신 태국 아이스 티



-그래도 갑자기 말 놓으니까 기분이 좀 그러네


이 말 한마디에 중학교 동창과 단 한 마디도 섞지 않았어요. 정이 뚝 떨어지더라고요. 재수생이 되면 개족보의 원흉이 되죠. 친구의 친구가 갑자기 선배가 되고, 후배가 되다 보니까 친구와 친구의 친구랑 한 자리에 모이면 존댓말과 반말이 동시 통역사처럼 난리도 아니죠. 우리 학번은 특이하게도 고등학교 선후배가 무려 여섯 쌍이나 있었어요. 아무리 동기여도 고등학교 선후배는 깍듯해야 했거든요. 누가 정한 법인지도 모르겠어요. 처음에 입학해서 가장 힘들었던 게 호칭 문제였어요. 선배라고 부르는 거야 거부감이 없었는데, 동기 놈들이 자꾸 형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현역으로 들어온 애들이야 뭐가 문제겠어요? 형을 형이라고 부르는 건데. 내내 동갑이던 아이들이 갑자기 형, 누나가 될 수는 없잖아요. 어떻게든 형이란 호칭을 피하기 위해서 긴장을 풀지 않으려고 애썼죠. 그것도 귀찮아지니까 똑같이 재수를 한 선배들만 쫓아다니게 되더라고요. 얼마나 마음이 편하겠어요? 한 선배랑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같은 중학교 동창인 걸 알게 돼요.


-오, 너 몇 반이었어?

-그래도 갑자기 말을 놓으니까 기분이 좀 그러네.


저도 물러설 수 없죠. 네가 기분이 상한 것과 내 상처를 비교하면 이마트 에브리데이와 신세계 백화점 본점 차이란다. 졸업 내내 아주 정밀하게 공을 들여서 '쌩까기' 신공을 펼쳐요. 심지어 같은 버스에서도 우리는 없는 사람이 돼요. 에휴, 그깟 호칭이 뭐라고요.


-요를 붙여야지, 요를!


또 한 번의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어요. 여자 선배가 제 엉덩이를 치면서, 왜 이리 말이 짧냐고 혼을 내는 거예요. 저는 갑자기 유치원생이 된 거예요. 학교를 자퇴해야 하나? 모멸감이 우주를 뚫겠더군요. 재수를 한 제가 죄인이죠, 뭐. 지금 대학생으로 돌아가면 형, 누나라고 얼마든지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나름의 질서라는 게 있는데, 제가 뭐라고 시비를 걸겠어요?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건데요. 숙이고 들어가면 얻는 게 훨씬 많은 법인데요. 그 나이에는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죠. 한 살은 결코 넘을 수 없는 선이었니까요. 그걸 하루아침에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죠. 동갑이어야만 친구다. 이 서열 문화는 전 세계에서 오직 한국만이 가지고 있어요. 나이를 넘어서는 친구가 없지야 않죠. 그래도 기본값인 친구는 무조건 동갑이에요. 나머지가 예외인 거죠.


그런 특이한 나이 문화로 우리는 참 많은 걸 잃어요. 나이는 진짜 숫자죠. 매력적인 사람들을 위아래로 나누면서 일정한 거리만 만들어요. 나이 열 살 차이의 친구가 한국에서는 희귀하죠. 다른 세대의 시각을 공유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도 그렇게 박탈되는 거예요. 재수, 삼수를 한 사람들은 자신을 포기해야 해요. 그게 꽤나 매력적인 체험이란 생각을 해요.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서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을 미리 경험하는 거니까요. 세상이 자기 위주로 돌지 않는다는 걸 깨우치는 감사한 시간이기도 하죠. 가끔 제 엉덩이를 토닥토닥 때린 선배가 생각나요. 그렇게 아픈 적은 처음이었어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쓰는 마음에는 사랑이 깃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랑이 없는 글은 독이고, 공해니까요. 가장 따듯한 마음이 될 때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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