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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Oct 06. 2020

다섯 시 삼십 분. TV 시작만 기다리던 심심함의 시대

TV만 목 빠지게 기다리던 80년대

80년대엔 TV 정규 방송이 오후 다섯 시 반부터였죠. 다섯 시 반까지 어찌나 시간이 안 가던지요. 화면 조정 시간부터 틀어 놓는 건 기본이죠. 국기에 대한 맹세, 애국가 제창도 진심을 담았어요. TV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그렇게 뭉클하더군요. TV가 시작해야, 진짜 우리나라 만세인 거니까요. 길이 보전해야 하는 나라인 거죠. MBC에서 방영한 '호랑이 선생님'을 가장 좋아했어요. 나보다 형, 누나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국민학교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라 공감하기 쉬웠어요. 이재학, 주희, 황치훈은 전 국민이 다 아는 톱스타였죠. 밤 아홉 시만 되면 TV에서 '어린이 여러분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입니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 초승달에 잠이 든 아이 그림이 함께 등장했죠. 9시 수면은 거역하면 안 되는 법 같은 거였어요. 일단 어머니가 철저하게 그 법을 지키고 싶어 하셨죠. 잠이 안 와도, 억지로 눈을 감고 귀로만 MBC 뉴스를 들어야 했죠. 달동네, 보통 사람들, 수사반장, 초원의 집, 전우, 간난이를 재미나게 봤어요. KBS TV 문학관, MBC 베스트셀러 극장에서 나오는 단막극들, KBS 토요명화, MBC 명화극장도 전 국민이 학수고대하는 프로그램이었죠. 아, MBC '웃으면 복이 와요'를 하는 수요일만 얼마나 기다렸나 몰라요. 배삼룡의 개다리 춤, 땅따리 이기동의 닭다리 잡고 삐약삐약, 쿵따리 닥다 삐약삐약은 다음날 교실 아이들 모두가 쫓아했어요. 


참 심심했어요. 사교육이란 게 전혀 없었으니, 친구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죠. 저는 또래들이 주변에 많지 않았어요. 형처럼 활동적인 편도 아니었고요. 별명이 방안 퉁수였어요. 전라도 사투리인데, 방안에서만 퉁소(악기)를 부르는 사람이란 뜻이죠. 방에만 처박혀 있는 사람이 바로 저였어요. 아버지가 빗자루를 들고, 저를 내쫓으셨다니까요. 얼마나 밖으로 안 나갔으면요. 국민학교 1학 년 때는 한글도 제대로 몰랐어요. 흰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아무 잡지나 닥치는 대로 펼쳐 봤죠. 그래야 시간이 조금은 가니까요. 그림 위주로만 보는데도 이상하게 성인 잡지가 더 재미나더군요. 선데이 서울, 주간 경향이 방안에 굴러 다니면 사진과 그림 위주로 열심히 봤어요. 여자 연예인의 과감한 비키니가 처음 몇 페이지에 꼭 등장했죠. TV가이드도 인기가 참 많았어요. 손안에 쏙 들어오는 연예 잡지. 선데이 서울을 보면 어머니가 혼을 내시더라고요. 보면 안 되는 거니까, 더 재미날 수밖에요. 수명을 다 한 선데이 서울은 화장실, 아니 변소에 꼬챙이에 한 장씩 뚫려서 쓰기 좋게 매달려 있었어요. 할아버지 세대는 지푸라기도 썼다며, 신문지나 잡지가 나름 개선된 뒤처리 방법이라고 하시더군요. 잉크가 덜 마른 신문지로 뒤를 닦으면 엉덩이가 새까매지기도 했죠. 


여덟 살 아이는 몸 안에 에너지가 엄청나죠. 뛰어다니면서 그 힘을 소모해야죠. 즐길 거리, 놀 거리가 간절한 나이에 아무것도 없어 봐요. 그러면 아이는 책을 찾게 되고, 글자를 이해하려고 해요. TV를 볼 때는 놀랍게 집중하죠. 석유 파동으로 사라졌던 아침 방송이 시작됐을 때, 그 재미없는 '뽀뽀뽀' 때문에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어요. 


심심함 


지금은 '심심한 시간'이 사라졌어요. 늘 시끄러운 세상 속에 살아요. TV에선 백 개도 넘는 채널에서, 옛날 방송까지 싹싹 긁어서 보여주는데도,  분 단위로 리모컨을 누르죠. TV도 이젠 딱히 재미가 없어요. 유튜브와 넷플릭스 시대로 옮겨가고 있죠. 아이들은 무조건 게임이고요. 심심함의 시간은 다시 올 수 없을 거예요. 저는 그 지루한 시간에 가상의 세상을 설계하곤 했어요. 지금은 아무도 나를 몰라 주지만, 끝내는 내가 주인공인 시대가 올 거야. 꼭 정장을 입어야 하고, 나비넥타이까지 갖춘 후에 무도회장으로 가야지. 은쟁반 위의 환타를 한 모금만 마시고, 다시 올려 놀 거야. 놀이터 그네는 나만 독차지하고 타는 거지. 나비넥타이까지 하고 그네를 타는 왕자님을 본 적 있느냐? 이 거지들아. 나를 괄시하던 친구들에게 복수하는 상상이 주를 이뤘죠. 그때의 심심함이 지금 글을 쓰는 힘이 됐어요. 그 심심함 이젠 돈 주고라도 사고 싶어요. 지금부터 TV 끊고, 인터넷 끊고 살면 되지 않느냐고요? 알아서 굶으면 되는데, 왜 단식원에 거금 들이고 가겠어요? 명상을 하러 한 번 가야 할까요? 이 요망한 재미의 세상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저는 심심해지고 싶어요. 심심해지는 시간이 그런데 또 두려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토록 복잡하고, 이중적입니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글은 참 신기해요. 나중에 보면 새롭게 다가오더라고요. 시간이 흘러 삭힌 제 글은 또 어떻게 읽힐지 궁금해요. 그러니까 저는 된장을 담그듯, 간장을 담그듯 글을 씁니다. 익어라, 익어라. 아주 잘 익은 글을 꿈꾸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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