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공작새가 된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깃털이 한 움큼씩 빠지는 숫공작이요. 꾸준히, 풍성하게 빠져나가는 머리털을 쓸어 담을 때마다요. 매사에 심드렁한 것도 서글퍼요. 기다려지는 게 참 없어요. 소풍 전날 날씨 걱정하면서 잠들던 때가 저에게도 있었군요. 2교시면 배가 꺼져서, 점심시간이 지독하게도 안 왔어요. 기다림도 청춘의 특권이죠. 이 나이에도 비슷한 감정이 찾아오기는 하지만, 달라요. 뭔가가 빠졌죠. 청춘의 주말은 후각부터 초민감성이죠. 단골 술집의 지하실 락스 냄새만으로도 심장이 벌렁대던 그 후각이 이젠 없어요. 몇 년째 쓰지도 않는 냉장고 향수병들 다 처분할까 봐요. 주말에 입을 옷을 따로 빼두는 정성은 20년 전에 사라졌죠.
그런 제가 요즘 챙겨서 보는 유일한 프로그램이 있어요. MBC '놀면 뭐하니'요. '무한도전'조차 띄엄띄엄 보던 제가, '놀면 뭐하니'에 푹 빠진 이유는 쉬워서죠. '무한도전'은 박명수, 정준하, 정형돈, 노홍철, 하하의 캐릭터를 어느 정도는 알고 봐야죠. 가끔씩 보면 하하의 리액션이 시끄럽고, 박명수의 똥 씹은 표정이 무성의해 보여요. 그런 캐릭터인 걸 알고 봐야 마음 편히 볼 수 있죠. '놀면 뭐하니'는 프로젝트마다 새로 뭉치니까, 처음 보는 시청자를 배려해요. 캐릭터 예습 없이 쉽게 몰입할 수 있어서 좋아요.
'환불 원정대'는 엄정화, 효리, 제시, 화사. 정상급 여가수 넷이 결성한 '센 언니 그룹'이에요. 효리가 가장 눈이 가요. 본인이 늘 챙김 받고, 큰소리치던 입장이었는데, 자신보다 어린 제시와 화사를 컨트롤해야 하죠. 제시는 예측 불가능한 탁구공처럼 불쑥불쑥 사람들을 난처하게 해요. 악의가 없는 건 알겠는데, 삼십 분만 같이 있어도 사람들이 사색이 되더군요. 진이 빠지는 거죠. 이 프로젝트를 이끌어 가야 한다. 유재석이 맡고 있는 부담을, 이번엔 효리가 나눠서 맡고 있어요. 유일하게 캐릭터에 성격을 부여하죠. 확실히 센 여자여야 한다. 나서서 쏘아붙이는 말들을 해요. 손해 볼 걸 알면서도, 한 성깔 하는 모습을 과장해서 보여주더군요.
-비행기 타는 게 결혼 전까지는 하나도 안 무서웠는데, 지금은 좀 무서워. 혼자 남을 남편이 걱정돼서.
김종민이랑 차 안에서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더군요. 남편이 걱정된다는 사랑꾼 효리보다, 전성기 때조차 삶에 큰 미련이 없었다는 듯한 말이 더 들어오더군요. 다시 태어나면 효리로 태어나고 싶은 여자들이 세상에 제일 많을 거예요. 스타일, 카리스마, 미모, 스타성에서 최고 중에 최고인 효리는 삶이 만족스럽기만 하지는 않았나 봐요. 인기는 공짜가 아니잖아요. 관심과 사랑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수많은 스타들이 악플과 루머에 지쳐서 목숨을 끊었으니까요. 화려함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지만, 무대 뒤에서는 적잖이 시달렸을 효리가 보이더군요.
이미 성공한 이들의 이야기여서 더 흥미로워요. 우리는 꿈을 꾸죠. 톱스타들이 한 번씩 누렸던 전성기를, 나도 한 번쯤은 누려보고 싶다. 그런 꿈요. 누구나 알아주고, 게다가 돈도 많이 버니까요. 누릴 걸 다 누린 톱스타들도 나이를 먹고, 몸도 아프고,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 예전만 못한 인기를 받아들여야 해요(효리는 여전하지만요). 한 때의 전성기가 모든 걸 다 책임져주지 않아요. 예능을 다큐로 보는 것처럼 바보는 없죠. 그래도 슬쩍슬쩍 나오는 말에서, 태도에서 진정성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해요. 천하의 효리도 통제불능 제시 앞에선 차분해지는 장면에서 묘하게 긴장되더군요. 참는 걸까요? 이해하는 걸까요?
드디어 환불 원정대 신곡 'Don't touch me'가 오늘 공개됐어요. 오래간만에 심장이 벌렁대네요. 와, 제시의 랩이 들어가니까 노래가 20%는 핫해지더군요. 좀 뻔한 거 아닌가 싶었는데, 화사와 제시가 멱살 잡고 노래를 끌어올리네요. '놀면 뭐하니' 안 보시는 분들은 무슨 소리인가 싶겠네요. 죄송합니다. 보고 나니,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내일은 덜 재밌어도 돼요. 오늘이 더 재밌으면 돼요. 그런 오늘을 매일매일 쌓아서, 평생을 채우고 싶습니다. 지금 냉장고에 있는 가장 맛난 걸 꺼내 먹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