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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Oct 12. 2020

한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극단적일까요?

왕따는 학교를  졸업해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어요

학교 다닐 때를 곰곰이 생각해 봐요. 대학교 때는 없었는데, 고등학교 때까지는 왕따가 늘 있었어요. 제가 왕따가 된 경우도 있고요. 가해자(주도적이지는 않았지만) 부류에 속한 적도 있었죠. 왕따는 대세를 거스르는 '마이너'에게 일어나죠. 엉뚱한 질문, 촌스러운 외모, 재수 없는(잘난 척을 한다든가) 행동을 한 아이들이요. 재수 없는 행동을 한다고 다 왕따가 되는 건 아니에요. '만만해야 해요'. 압도적으로 공부를 잘한다거나, 집이 부자면 왕따까지 되지는 않아요. 대세를 거스르면 안 되지만, '대세' 역시 사람 봐 가면서 공격해요. 마치 피라니아가, 개중 만만한 물고기에게 달려드는 것처럼요.  


왕따가 외국이라고 왜 없겠어요? 철없는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인데요. 그런데도 제가 굳이 '극단적인 한국인'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한국이 더 칼 같이, 반역자(?)를 내친다는 거죠. 선생님이 진도 오늘 어디부터지? 이렇게 물었는데 한 친구가, 오늘 쪽지 시험 보신다고 했는데요? 이렇게 말하면 난리가 나죠. 무사히 넘어가나 싶었는데, 한 놈 때문에 쪽지 시험을 보게 된 거죠. 그 아이는 시험 준비도 했겠다, 선생님이 진도를 묻기까지 했으니 냉큼 대답한 것뿐이죠. 그렇게 쪽지 시험을 보고, 시험을 망친 아이 중 하나가 그 아이 머리통을 갈겨요.


-다음부터 아가리 놀리면 죽여 버린다.


아이는 억울하고, 교실의 공기는 냉랭해요. 맞은 아이를 편드는 사람은 극소수죠. 눈치 없는 새끼, 잘난 척하는 새끼, 자기만 아는 새끼가 되는 거죠. 즉 교실 속 세상에서 선생님이 약속한 시험을 꼭 보고 싶었던 아이가 살아남을 수 없어요. 대부분은 준비를 안 했으니까요. 아이는 바른 소리를 한 거고, 굳이 따지면 정의에 가깝지만, 그런 아이는 대세의 정서를 거스르는 실수(?)를 한 거죠. 왕따가 안 되려면 적당한 상황 판단은 필수죠. 나대면 피를 부른다. 늘 명심하고 살아야 해요. 언제 누군가가 내 뒤통수를 후려갈길지 모르니까요. 대세는 그 아이가 맞을 때, 카타르시스까지 느끼죠. 속이 후련해요. 아니라고, 억울하다고 하겠지만, 실은 공범이죠. 폭력에 침묵으로 동조하는 거죠. 억울해하는 놈이 모자란 거고, 다들 그 아이가 맞는 이유에 공감해요.


인터넷 여론도 마찬가지죠. 대세를 거스르려면 큰 용기가 필요해요. 다들 욕하는데, 자기만 반대 의견을 내봐요. 조리 돌림 각오해야죠. 입을 다무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하죠. 그러다 보면 소수의 목소리 큰 아이들이 '대세'를 장악해요. 그게 여론인 것처럼 보여요. 동조하는 사람들만 계속 늘어나요.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침묵으로 숨으니까요. 그렇게 형성된 대세는 거침이 없죠. 자신들의 목소리가 유일한 정의라고 생각해요. 심판자의 역할까지 하려고 들죠. 누군가가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꿈쩍 안 해요. 당당하면 왜 죽어? 가해자들의 조리 돌림 논리가 이렇더군요.  


비록 내가 바람을 피우긴 했어도, 군 문제는 깔끔하다. 그들은 군문제에 열심히 달려들어 물어뜯어요. 부동산으로 한몫 당긴 건 사실이지만, 가족 중에 연예인은 없다. 연예인을 씹을 때, 주저할 이유가 없죠. 공격하는 사람들이 늘 바뀌니,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되면 힘없이 나가떨어져요. 폭우 강의 범람을 어찌 한 인간이 막나요? 마찬가지예요. 여론의 일방적 공격은 격랑보다 더 파괴적이죠. 이런 문화가 한국에만 있는 건 아니죠. 결국 정도의 문제예요. 내가 과연 답답하고, 눈치 없는 아이와 한 교실에 있을 수 있는가? 우리나라가 No의 비율이 훨씬 높다는 거죠. 그런데 어쩌나요? 누구라도 응징받는 입장이 될 수 있는 걸요. 내 아들, 딸이 길거리 캐스팅이 되고, 실수로 유턴 신호를 못 보게 될 텐데요. 내가 학교 다닐 때 애들 좀 패고 다녔는데, 내 아이가 학교 폭력으로 응급실로 실려가면 어쩌실 건가요? 가해자의 아빠가 사실은 내가 그렇게 두들겨 패던 그 왕따였다면요? 아이의 억울한 피해를 당당히 주장할 수 있을까요? 결국 내게 다 돌아와요. 내가 세상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건, 자신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를 당기는 것과 같아요. 관용이 무슨 남을 위한 거예요? 자기를 위한 보험이에요. 타인을 용서하고, 품어야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자신의 '왕따 순간'에 당당히 저항할 수가 있죠. 누군가가 그런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거죠. 공황장애가 소화불량처럼 흔해진 세상, 이제 '관용과 공존'을 과목으로 지정해서 가르치고, 배울 때가 아닌가 싶어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팍팍한 세상에 기름칠이라도 하는 글쟁이이고 싶어요. 어쩔 수 없잖아. 그렇게 방치하기엔 너무 많은 영혼들이 시들어가고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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