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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Oct 11. 2020

따뜻한 나라에서 오래 살다 보면은

태국에서 십 년 이상 머물렀더니요 

겨울에 중국에 머문 적이 있어요. 날씨도 날씨지만, 건물 안이 그렇게 춥더군요. 우리처럼 온돌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찬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데도, 식당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장사를 하는 거예요. 저만 빼고, 아무도 신경 안 쓰더군요. 중국이나, 러시아에 오래 머물렀다면 추위에 강해졌겠죠. 저는 더운 나라 태국에서 십일 년째 머물고 있어요. 더운 나라에서 살면서 저는 더위에 강해졌을까요? 어떤 점이 달라졌을까요? 


1. 걷는 걸 싫어하게 됐어요 


걷는 걸 무척이나 좋아했어요. 한국은 걸을 곳이 많으니까요. 공원이 좀 많나요? 영국에서 지낼 때도 공원이 큰 낙이었죠. 너무 춥거나, 더울 때만 빼면 무조건 걸었어요. 태국은 엔간히 더워야죠. 게다가 인도가 좁아요. 아예 없는 곳도 많아요. 차들 쌩쌩 다니는데, 벽에 찰싹 붙어서 걷고 싶겠어요? 방콕에도 좋은 공원은 걸을만해요. 룸피니 공원이 대표적이죠. 그래도 더워진다 싶으면, 산책은 고문이에요. 태국 사람들은 왜 저렇게 게으를까? 1km도 안 되는 거리를 오토바이 택시 불러서 가니까요. 네, 제가 지금은 그런 사람이 됐어요. 날씨가 좀 선선해도 오토바이 택시를 타요. 버릇이 된 거죠. 방콕이 다 좋은데, 걷는 낙이 없어요. 아침에 부실한 인도로 열심히 달리기 하는 사람들을 종종 봐요. 존경합니다. 저는 죽어도 그렇게 못 뛰어요. 


2. 모기가 저를 안 물어요 


처음엔 저만 물렸어요. 태국 사람들은 멀쩡하더군요. 저는 긁기 바쁜데, 야외 식당에서 다들 밥만 잘 먹는 거예요. 태국 사람들은 모기에 강한 유전자라도 갖고 태어난 걸까? 오래 머물렀더니, 저도 이제 끄떡없어요. 모기가 이제 저도 태국인으로 아는 거죠. 신선하고, 부드러운 수입산(?) 피부에 태국 모기들이 환장하나 봐요. 예전엔 뿌리는 모기약을 항상 가지고 다녔어요. 이젠 그깟 모기 딱히 신경 안 쓰여요. 관광으로 태국 온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서 긁는 모습을 보면, 뭔가 뿌듯하더군요. 오래 살면 자연산 갑옷이 생기더라고요. 


3. 목소리가 작아졌어요 


우리 집안 식구들이 목소리가 커요. 흥분하면 더 커지죠. 제가 가족들이랑 한국말로 통화를 하면 싸우는 줄 알더군요. 태국말에는 다섯 개의 성조가 있어요. 같은 발음이라도, 어떤 음높이로 발음하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거죠. 외국인에게 태국말이 어려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죠. 대신 작은 소리로도 뜻 분간이 가능해요. 굳이 크게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어요. 처음 태국 말이 모기가 윙윙대는 것처럼 들리더라고요. 몸은 조폭 씨름 선수 같은데, 들릴 듯 말듯한 소리로 조근조근 말하는 게 그렇게 재밌더라고요. 태국말은 거의 문맹 수준이지만, 말투가 바뀌었어요. 한국에서처럼 목소리가 커지면 태국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라니까요. 작게 이야기해도 들린다는 걸 이젠 알았어요. 


4. 추위를 사랑(?)하게 됐어요 


사람이 없는 거에 더 애틋해진다고, 동남아시아에서는 추위기 돈이에요. 매일 찌는 듯 더우니까, 흐리고, 서늘한 날씨를 그렇게들 좋아해요. 런던에서 우울하고, 습한 겨울 한 철 보내고 나면, 그런 소리 쏙 들어갈 텐데요. 태국 사람들은 그래서 조금이라도 추운 곳으로 피서를 다녀요. 그래 봤자 영상 5도 정도인데 목도리에, 털장갑까지 끼고 일출 보러 가요. 입김 한 번만 봐도, 달나라에 온 것처럼 그런 호들갑이 없어요. 갑자기 서늘해지고, 바람이라도 불면 참 좋은 하루구나. 저 역시 덩달아 행복해지더라고요. 아, 그렇다고 해도 한국의 겨울은 무서워요.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추위에 한 시간만 걸으면 오만정이 떨어지지 않나요? 대신 호빵이 있고, 어묵탕이 있고, 라면이 있죠. 한국의 겨울은 저에겐 가혹하지만, 그 가혹함을 녹여주는 보상도 충분히 많죠. 안경에 입김이 가득해지는 따뜻한 칼국수집에서, 만두가 가득 들어간 칼국수 먹고 싶네요. 


5. 너무 빠르면 적응이 안 돼요 


한국은 뭐든지 신속 정확하죠. 택배가 다음날이면 도착하는 거의 유일한 나라죠. 그렇다고 태국이 생각보다 느리지만은 않아요. 아니다. 제가 그 속도에 익숙해진 거겠죠. 태국 사람들은 자동차 클랙슨을 참 안 눌러요. 신호가 바뀌었는데 앞차가 30초간 움직임이 없어요. 그럼 클랙슨을 눌러야죠. 최후의 최후까지 참았다가 눌러요. 그만큼 기다림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나라죠. 제가 인내심이 늘었다기보다는, 노력해서라도 기다려주는 미덕을 갖고 싶어요. 쉽게는 안 되더라고요. 똑똑하고, 민첩한 한국에서 훨씬 오래 살았으니까요. 헬스클럽에서 회원보다 더 뚱뚱한 퍼스널 트레이너를 보신 적 있으세요? 회원보다 다리가 더 안 찢어지는 요가 선생님은요? 태국에서는 보실 수 있어요.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불쾌한 감정은 또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는 세상이 지구에 한 곳쯤은 있어도 되지 않을까요? 능숙한 사람들이 너무 많지 않아서, 안심이 되는 나라요. 무능한 나라 아니고요. 너무 유능하지만은 않는 나라요. 제 취향을 확실하게 저격한 태국입니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일요일엔 일요일에 어울리는 글을 쓰고 싶어요.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는 글이요. 요일마다, 날씨와 계절에 따라 어울리는 글을 쓰고 싶어요. 고객이 원하는 찾아가는 서비스를, 글로 구현해보고 싶어요. 욕심도 참 많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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