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신창이의 하루

예민한 자는 하루가 길다

by 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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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리. 아침 7시 01분, 지금 일기를 쓰는 시간.


어제가 첫 출근날. 아침 아홉 시까지 무사히 도착. 쉽지 않았다. 배차 간격이 20분인 14번 마을버스를 미금역 7번 출구에서 가까스로 잡았다. 일어나기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났다. 브런치를 쓰고, 씻고, 이것저것 챙겼다. 고기리에 방이 생겼다. 면도기, 수분크림, 양말을 챙겼다. 낯선 곳에 방이 생기면 흥분이 된다. 새로운 삶을 산다. 이번 생의 나는 여러 개.


서늘한 기운. 테라스에 앉아서 별 다섯 커피의 방향성에 대해 임 대표, 장 대표, 김이사와 이야기를 나눈다. 임 대표님, 장 대표님, 김이사 님이라고 써야 하나? 존경심은 담되, 짧게, 공식적인 호칭으로 쓰기로 한다. 장 대표가 초심을 이야기한다. 왜, 우리가 홈커피, 집에서 내리는 커피를 생각하게 됐을까? 즐거움의 공유가 아니었을까? 끄덕끄덕. 부산 부경대에 새롭게 점포를 열었다. 별 다섯 커피는 별개 법인으로 대학교 내 카페를 여러 개 운영한다. 한 달 이상 걸린 공사다. 공사가 끝나는 날 바다가 보였다. 한 달 내내 바다였지만, 한 달만에 보였다. 여기, 바다가 있구나. 아내이자 별 다섯 커피의 대표인 임 대표도 그제야, 아, 바다다. 둘에겐 세 아이가 인생의 전부. 그다음이 커피. 일에 미친 부부. 그들이 내린 커피를 마신다.


왜, 그동안 내가 커피를 꼭 남겼나도 알게 됐다. 먹다 보면 식어빠진 커피가 시다. 어떤 때는 쓰고, 시다. 산미가 들어간 커피에 대한 반감이 딱히 없다. 좀 다른 느낌으로 시다. 별 다섯 커피는 스카치 캔디 향이 난다. 언뜻 물이다. 물인데 그 안에 공간이 생긴다. 공간에서 새롭게 향이 나온다. 천천히, 은근하게. 가볍지 않게 끝까지 간다. 물 위를 떠다니는 자유로운 버터 스카치 향으로 하늘하늘. 커피도 생물 같아서 어떤 때는 화를 낸다고 한다. 앞으로 신맛 없는 커피만 마시고 싶다. 지금까지 내가 마신 별 다섯 커피는 화를 내지 않았다. 한 번 정도 냈나? 그런 것도 같다.


홈커피가 과연 될 것인가? 회원으로 가입해서 원두를 받아 마실 사람이 많을까? 커피콩을 갈아서 귀찮게 내려 마실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말 좋은 커피를 제대로 먹고 싶은 사람이 분당, 용인, 판교에만도 만 명은 될 것이다. 맛은 주관적이다. 주관을 뛰어넘는 맛도 있더라. 별 다섯 커피에서 알게 됐다.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글을 쓰겠다고 부탁드려볼 참이다. 카페에서, 방에서.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닭장 같은 사무실을 싫어도 견디는 2천만 직장인들에게 죄송하지만.


가리비가 왔어!


통영RCE 세자트라숲의 서 PD, 김 PD가 가리비를 보내왔다. 그냥 먹어도 너무 맛있어. 어머니의 흥분이 카톡으로 전해진다. 통영에서 오래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시내에 작은 자취방을 얻어서. 가끔씩 RCE 사람들과 수다 좀 떨다가, 내 방에 돌아와서는, 작은 글을 쓰고 싶다. 그땐 소설이 될 것이다.


미리 잡혔던 약속 때문에 서울로 간다. 여섯 시 반. 성당 후배, 북촌 탁구장 관장님, 그리고 그들의 지인. 많이 마르셨네요. 그동안 살이 더 빠지셨어요. 이마에 땀이 난다. 저렇게 생겼어도 고대생이야. 고대생처럼 안 생겼지? 성당 후배는 나를 보고 싶어서 이 자리를 마련했다. 그 말이 재밌거나, 가깝게 만드는 계기라고 생각한다. 여러 번 한다. 사랑니를 발치한 나는, 빈자리를 혀로 긁는다. 고대생은 원래 후지게 생겼어요. 일단은 이 자리가 재밌기를 바란다. 재치스럽게 받아쳤다고 생각한다. 온몸에서 땀이 나고, 춥기를 반복한다.


폰으로 메일이 왔다. 표지 시안이다. 장문의 글과 함께다. 편집장이 그 제목을 고른 이유다. 자신이 옳다는 제목만 원래는 디자인을 맡겼다. 디자이너가 다른 후보도 디자인을 했네. 안 해도 될 일을 했다는 투다. 나의 의견이, 댓글을 단 이들의 의견이 별 의미가 없다. 박민우를 아는 주관적인 사람들 말고, 분석력이 뛰어난 한 사람의 결론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나는 경청할 필요가 있다. 내 앞의 성당 후배와 오랫동안 선배였던 편집장. 2019년 가장 험난한 밤이다.


고기리로 간다. 심야 버스를 타고 정자역에서 내린다. 미금역까지 가는 버스인 줄 알았다. 기사가 내리라고 한다. 깜짝 놀란다. 미금역 버스를 또 탄다. 열한 시가 넘었다. 새롭게 요금이 찍힌다. 심야버스에서 내릴 때 찍는 걸 깜빡했다. 정자역에서 미금역. 무슨 신호가 이렇게 많아? 14번 버스를 놓치면, 20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 고기리 숲 속, 으슥한 어둠으로 열 두시가 다 되어서 들어간다. 제발, 제발! 나는 오늘이 힘에 부친다. 14번. 놓쳤다. 20분을 기다려야 한다. 아닌가? 버스 정류장을 지나, 신호에 걸린, 작고, 작은 마을버스 14번. 있다. 뛴다. 문을 열어준다. 오늘, 최고의 위로, 신호에 걸린 14번 버스. 고기리, 으슥한 숲길, 기다란 원룸. 새벽에 몇 번을 깬다. 잠이 좀 보충이 되자, 조금 덜 아프다. 거울을 본다. 내 얼굴이 가득한 표지 시안도 보다. 표지의 얼굴은 그나마 미화된 얼굴.늘 하루도 이 몰골로 살아야 한다. 내 얼굴이 표지로 나와도 되나? 깜짝 놀랐다. 왜 이렇게 까칠해? 왜 이렇게 예민해? 나의 예민함은 쓰레기다. 이 예민함이 구역질 난다. 그 예민함 끝에 글이 있다. 나의 약함이 나의 글이다. 이제는 자유롭고 싶다고? 글을 안 쓰면 된다. 불면의 밤을 보내는 당신! 내가 당신이다. 한참을 공감받고 싶다. 약하고, 약한 글이다.


고기리의 아침이다. 새로 내린 별 다섯 커피를 마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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