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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Oct 20. 2020

나의 영어 고군분투기

남의 나라 말은 어려운 게 당연하다

9개월 머물렀던 런던은 제게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도시예요

영어만 잘하면 소원이 없겠다. 그런 분 많으시죠? 대학생 때 분당에 살았어요. 버스 안에서 두 고등학생이 유창하게 영어로 대화하더라고요. 대학생이 되도록 저는 뭐했던 걸까요? 대원외고 학생들이었던 것 같은데, 외국에서 오래 살다 왔나 보더라고요. 자체 발광이란 게 저런 거구나. 한국말보다 영어가 쉬운 한국인이라니. 백인들의 세상 하면 뭐가 떠오르세요? 선진국, 금발, 푸른 눈, 아름다움, 배려, 관용, 명품 등등이 떠오르시지 않나요? 백인이 더 아름답다. 이런 게 인종 차별이죠. 부끄럽지만, 우리에게 조금씩은 있을 거예요(깨뜨려야할 환상이죠). JTBC 비정상회담에 나오는 출연자 중에 가장 많은 인종이 어느 인종인가요? 가장 인기 많은 출연자들은요? 쌍꺼풀, 오뚝한 코, 작은 두상, 길쭉한 다리. 백인의 외모가 아름다움의 기준이죠. 영어만 잘하면, 모델 같고, 인형 같은 백인들과 어울릴 수 있다. 그런 철없는 환상이 저에게도 있었어요.


80년대엔 AFKN이라는 TV 채널 기억하시나요? 주한 미군들을 위한 미국 채널이었죠. '헐크'나 WWF 레슬링이 큰 인기였지만, 저 같은 꼬맹이에겐 단연 만화 영화였죠. 알아들을 리가 있겠어요? 만화니까 켜 놓고 보는 거죠. 그냥 빨려 들어가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만화 영화들이 엄청 재밌지도 않았어요. 그냥 미국 만화 영화여서 좋았어요. 보고 있으면 나도 미국 아이와 동등해지는 거라 여겼으니까요. 저 말을 알아들을 때가올까? 제 평생 가장 비현실적인 꿈이었죠.


잡지사에서 일하면서 취재 형식으로 필리핀 일로일로에서 영어를 배웠어요. 교사들과 1대 1 개인 과외 형식으로요. 영어가 바로 나오지는 않아도, 나오기는 하더라고요. 조금만 하면 되겠는데? 그런 자신감으로 영국으로 떠나요. 런던에서 어학원을 끊고, 영어 공부를 시작하죠. 네, 저도 어학연수라는 걸 했어요. 언어가 간절했다기보다는,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는 경험이 간절했죠. 그냥 영국이고, 런던이어서 다 좋았어요. 이상하죠? 필리핀에서 한 달 있을 때보다 어째 영어 실력이 주는 거예요. 어울리는 애들이 일본 애들, 중국 애들이었으니까요.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서 온 친구들도 영어 실력은 허접했는데, 그래도 우리(한중일)보다는 탁월하더군요. 허접한 '동북아시아 영어'가 반가웠어요. 말도 안 되는 발음이 쏙쏙 들어와요. 네가 왜 그런 발음으로 영어를 하는지 나는 알지. 내 허접한 발음으로 똑같이 보여줄게. 허접 영어 스피커끼리 서로를 의지하며 지냈어요. 유창한 아이들이 얼씬도 못하게 보호막을 치면서요. 우리가 이렇게 가까운 이웃이었나? 부족한 영어 실력이 우리를 똘똘 뭉치게 해 주더군요.


큰 마음먹고 미국 드라마 '프렌즈' DVD를 한국에서 사 가지고 갔어요. 보기는 하는데 뭐가 들려야 말이죠. 하루는 술에 취해서 프렌즈를 틀었어요.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귀에 쏙쏙 들어오는 거예요. 해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어가 엄청 늘었던 거구나. 다음날 술이 깨고 프렌즈를 틀었어요. 어라? 하나도 안 들리는 거예요. 기억 조작일까요? 들리기는 했던 걸까요? 영어라는 게 살아 움직이는 꿈틀이 같은 걸까요? 귓구멍에 잠시 왔다 도망간 걸까요? 그나마 프렌즈는 미국식 영어죠. 영국식 영어는 왜 발음이 그 모양인가요? 네, 영국에서 시작해서 '영어'인 거죠. '미어' 아니죠. 원조 맛집 가서, 왜 맛이 이러냐고 행패를 부리는 거나 마찬가지인 것도 알아요. 그나마 좀 만만한 게 미국 영어인데, 영국 사람도 미국식으로 발음해 주면 덧나나요? 목구멍에 양말 한 짝씩 집어넣고 발음하나요? 제게는 영국 영어가, 오바이트 참고하는 영어로 들렸어요. 영국에서 더 과묵하고, 수줍어졌어요. 영국 사람과 눈만 마주치면 심장이 덜컹 내려앉더라고요.


런던에 있는 9개월은 시간 낭비, 돈 낭비였다고 생각했죠. 'Queer as folk'라고 아시나요? 미국에서 상당히 인기를 끌었던 게이 시리즈물인데요. 원래 버전은 영국 거였어요. 영국판 'Queer as folk'를 보는데, 들리는 거예요. 그 해괴한 영국 영어가 귀에 쏙쏙 들어오는 거예요. 이게 무슨 조화일까요? 런던에서 어학연수를 할 때, 아주 단순한 대화조차도 힘들었어요. 영국 사람들과는요. 짧은 안내 방송, 인사말도 몇 초간 멍해진 후에 겨우 분석이 가능했죠. 그런데 길고 긴 영국 문장이 들려요. 그것도 몇 년 후에요. 진짜 영어 공부는 계단식인가 봐요. 정체의 순간을 오래 견디면, 득도하듯 들리는 거죠. 비법이요? 그건 진짜 영어 잘하는 사람들한테 물어보셔야죠. 유튜브에 많이 나와요. '쉐도우 영어'로 검색하면, 리스닝 도움 많이 되실 거예요. 한글 자막을 보면서 일단 영화를 보고, 영어 자막으로 바꿔서 반복, 또 반복해서 보는 식이죠.


자막 없이 영화를 보는 건 저에게는 힘들어요. 로맨틱 코미디 정도는 가능해요. 법정물, SF로 넘어가면 아예 안 들려요. 상황을 예측할 수 있어야, 낯선 언어를 눈치와 조합해서 해석해낼 수 있다는 얘기죠. 전문 용어가 툭툭 튀어나오면 답이 없어요. 상위 1%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니, 그런 사람들은 장르 불문 영어가 우습겠죠. 하지만 99%는 저처럼 어느 선에서 치고 올라가기는 힘들 거예요. 꼭 치고 올라가야 할 사람은 노력하셔야죠. 하지만 언어라는 게, 그렇게 무 자르듯이 '완벽'에 도달하는 개념은 아닌 것 같아요. 우리나라 말도 안 들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나요? 안 들릴 수도 있다. 안 들리는 게 당연하다. 그렇게 조금은 느슨하게 언어에 접근하는 건 어떨까요? 왜 나는 이 단어가 안 들리지? 부분적인 '미성취'에 너무 집착하고, 실망하면 그 언어가 도망가 버리더라고요. 너무 꽉 쥐려고 하지 마세요. 모래처럼, 연기처럼 사라져요. 언어가 굉장히 신비로운 존재예요. 어루만지듯이 접근해 보세요. 조금은 더 살갑게 느껴지실 거예요. 알아서 다가올 거예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저의 글이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해요. 혹은 작은 기다림, 기쁨 같은 거요. 저의 글과 함께 조금씩 나이를 먹어 보는 건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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