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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라, 아니 꺼져라! 청춘의 음식들아

나이를 먹으면서 멀리하게 된 음식들

by 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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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금이라는 한식당에서 순두부찌개를 먹었어요. 참나, 순두부 하나에 250밧(9천 원)이네요. 태국이 한국보다 식재료 가격은 더 씬데 한식은 왜 더 비싼가요? 하긴 한국의 태국 음식은 순두부찌개보다 훨씬 비싸긴 하네요. 고향 음식은, 멀리 갈수록 대접받는 법이죠. 오오 어묵 볶음인 줄 알았는데, 송이 부침이네요. 그냥 김치가 아니라, 겉절이가 나오는군요. 이 집 음식 좀 하네요. 아삭아삭 무생채도, 추억의 소시지 반찬도 남김없이 싹싹 비웠어요. 밥 한 공기만 먹기로 다짐을 했건만, 공깃밥 추가를 외치고 마네요. 남으면 다 버리는 반찬, 제 목구멍에 버리려고요. 음식물 쓰레기 좀 줄여보겠다는 갸륵한 마음 좀 알아주시라고요. 제가 이렇게 밥에 집착하는 이유는, 먹을만한 게 점점 줄기 때문이기도 해요. 제가 이제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을 적어 봤어요.


먹기만 하면 속이 더부룩한 라면


라최몇(라면 최대 몇 봉지까지 먹을 수 있나) 저는 3 봉지요. 기록이라고 하기엔 좀 빈약하지만, 대신 밥까지 말아먹었어요. 대식가 기록은 중3, 고1 때 대부분 세운 기록이죠. 먹으면 금방 꺼지는 게 밀가루 음식 아니었나요? 이젠 라면만 먹으면 속이 더부룩해요. 태국엔 쌀면으로 된 컵라면이 편의점에 있어서 그나마 가끔 먹어요. 얼마 전에 속이 뒤집어진 날, 한국 라면 오징어 짬뽕을 먹은 날이었죠. 언제나 먹고 싶지만, 이젠 두 눈 질끈 감으려고요.


잠도 안 와요. 속까지 뒤집어지는 커피


커피맛을 차라리 몰랐을 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한 여름에 얼음 동동 라테 한 잔이 얼마나 달달하냐고요? 커피 믹스는 좀 맛있나요? 그런데 마시기만 하면 잠을 못 자요. 멀쩡하게 잘 마시던 것들인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냐고요? 게다가 역류성 식도염에 아주 직빵이에요. 마시면 그날 저녁에 꾸물꾸물 위산이 기어 나와요. 가슴팍이 타 들어가는 통증에 놀라서 깬다니까요. 전기고문, 불고문이 기다리는데 어찌 마시냐고요? 스타벅스 디카페인 커피는 또 괜찮더군요. 그것만 마셔요. 스타벅스 아니면, 커피 입에도 안 되는 사람이 됐습니다. 고급 취향 납셨습니다.


우유도 몸에서 안 받아요


원래부터 안 받았는데, 무시하고 계속 마셨던 게 아닐까 싶어요. 가끔 배탈 나고, 가끔 속이 더부룩해도 우유와 연관 지어 생각을 못 했던 거죠. 최근에 우유가 들어간 음식을 일절 끊어 봤어요. 과자류, 밀크티 같은 것도요. 신기할 정도로 속이 편해요. 왜 이리 소화가 안 되나 싶었는데, 우유였어요. 전적으로 우유 탓은 아니겠지만, 아주 큰 비중으로 저를 괴롭혔던 거예요. 사람마다 다르겠죠. 저는 우유를 소화해낼 능력이 없었던 거예요. 케이크, 크림 스파게티, 찬 우유와 초코파이는 이제 제 인생에서 꺼져 주세요. 저도 독한 마음먹고 새 삶을 살 테니까요.


타고난 술꾼인데, 술도 정리 수순


제가 외가 쪽을 닮아서 술을 좀 마셔요. 술이 맛있잖아요. 와인은 와인대로, 맥주는 맥주 대로, 막걸리는 막걸리 대로요. 이젠 술을 마시면 후유증이 며칠을 가더군요. 우울함을 동반한 무기력증에 죽겠더라고요. 마약 중독자들 금단 현상이 이런 느낌이려나요? 마실 때는 그렇게나 행복한데, 과음을 하면 며칠간 세상이 그냥 다 침울해요. 나이를 먹으니 겁도 많아져요. 마시고 죽자. 그런 혈기는 없어요. 이걸 마시면 며칠이 괴로울까? 그 생각부터 나니 술이 무섭더라고요. 가끔 맥주 한 병 정도는 마시는데, 다 못 마셔요. 지금 저의 주량은 맥주 반 병입니다. 저, 안 울어요. 안 슬프다니까요.


햄버거에 콜라요? 의절하고 산 지 꽤 됐어요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먹죠. 뉴욕에서 쉐이크 쉑 버거를 안 먹을 순 없으니까요. 제가 한 끼 메뉴로 햄버거를 고민하는 일은 근 3년 간 없었네요. 미국에선 대표 버거를 먹어야 한다는 강박에 몇 번 먹기는 했지만요. 탄산이 들어간 음료도 마찬가지예요. 몇 달에 한 번 먹을까 말까예요. 무익하다는 걸 왜 먹냐고요? 그런 이유로 아이스크림(어차피 우유가 들어간 거긴 하지만)도 끊었어요. 벽에 똥 칠 할 때까지 살 거냐고요? 제가 이런 음식을 멀리한 이유는 약해서예요. 스무 살 때 건강 챙기는 사람들을 비웃었던 사람이 바로 저였어요. 이제 죗값을 치르나 봐요. 먹고도 잘 소화시키고, 잘 싸면 고민도 안 해요. 뚱뚱해지는 걸로는 눈 하나 깜짝 안 할 자신 있어요. 더부룩하고 무기력한 상태로 하루를 허비는 게 너무 억울해서요. 그러다 보니 이 많은 음식들과 결별하고 말았네요. 속상하죠. 그립죠. 어쩌겠어요? 제 몸이 늙었는 걸요. 먹을 수 있는 것들 중에도 맛난 거 아직 많은데요, 뭐.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게 떡볶이네요. 이건 죽어도 못 잃어요.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다고요? 저는 떡볶이 때문에 못 죽어요. 나이를 먹고 나니, 떡볶이가 인생 음식이 되는군요. 살아봐야 안다니까요. 그 흔하고, 저렴한 음식이 이리 사무칠 줄이야.


PS 매일 글을 씁니다. 백 살까지 살아도, 2만 편도 못 채우더군요. 그래도 만 편은 채워야죠. 작은 글들이 모여서, 만 편의 작은 집을 짓고 싶습니다. 보이지 않는 글집이요. 흠. 뭔가 뭉클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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