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면접에서 떨어졌어요. 최종까지 간 것도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영어 리스닝 시험은 거의 백지로 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면접까지는 갔어요. 만약 미주 한국일보에 붙었다면, LA에서 잘 적응했을까요? 미국 너무 좋다며 시민권을 신청했을까요? 1년은 엄청 행복해하다가, 스스로 나가떨어졌을 것 같아요. 일이 힘들면 힘들어서, 재밌으면, 더 재밌는 거 없나? 결국 사표를 썼겠죠. 이런저런 기구한 이유를 갖다 붙이면서요. 여행을 떠났을 거예요. 이왕 미국이란 땅에 왔으니, 캐나다도 한 번 돌고, 남미 일주는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여행을 시작하고, 여행기를 써내려 갔겠죠. 제목은 '1만 시간 동안의 남미'나 '면역력 제로 신문사 기자의 남미' 따위가 되지 않았을까요?
한국 예술 종합 학교 영상원에 붙었다면, 영화감독이 됐을까?
이건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절대 영화감독이 되지 못했을 거예요. 상처도 잘 받고, 지구력도 바닥권인 저는 그 많은 스태프들과 소통하고, 부딪힐 수 있는 깜냥이 안 돼요. 제 주변 사람들은 다 붙고, 저만 떨어졌어요. 이리 억울할 수가. 그때는 저만 잘난 줄 알았죠. 한예종의 탁월한 선택이었어요. 붙었다면 저만 잘 났다고, 현역 교수들을 마구 씹고 다녔을 거예요. 나처럼 뛰어난 인재를 받아들이기엔, 세상은 너무 미개해. 예술혼만 가득하고, 실행력은 제로인 저라는 나부랭이는 학교를 졸업하고, 시나리오 공모에 몇 번 도전했을 거예요. 운이 좋으면 한두 개 정도는 당선됐겠죠. 시나리오 학원 다닐 때 작은 상은 한 번 받아 봤어요. 내 시나리오를 마구 난도질하는 감독이나 프로듀서를 만나서 학을 떼겠죠. 그리고 짐을 쌌겠죠. '영화에는 없는 해피엔딩, 남미' 이런 시덥잖은 제목으로 여행기를 냈겠죠. 잘 안 팔렸을 거예요. 겉멋이 덜 빠진 채 여행을 했을 테니까요.
싸이더스에 붙었다면, 전지현, 지오디와 친구 먹었을까?
지오디가 싸이더스 소속이었던 거 모르셨죠? 처음엔 김태우만 JYP 소속이었어요. 여기도 최종 면접에서 떨어져요.
-그렇게 잘 났으면, 직접 하나 차리시든가요?
면접 담당자가 그렇게 쏘아붙이더라고요. 내가 제일 똑똑한가 봐. 저를 비아냥거린 건 줄도 모르고, 합격을 확신했다니까요. 싸이더스에 붙었다면, 무슨 업무를 맡았을까요? 기획 일을 했겠죠? 영화판에서 굴렀을 수도 있고요. 술자리가 많아서, 철야가 많아서 체력이 방전 났을 거예요. 응급실에 한 번 실려가고 나서, 나부터 살고 보자. 연예계를 떠났겠죠. 연예인들과는 꽤나 인맥을 쌓았을 거예요. 어딜 가든 저 좋다는 사람 한둘은 있을 테니까요. 당시 연예게 톱스타는 싸이더스에 많았어요. 김혜수, 조인성, 전지현과 우정을 쌓아서 제 책 팔이에 동원했겠죠. 서평단은 끝내주게 모았겠네요. 싸이더스에 사표를 쓰자마자, 짐을 싸고 떠났을 거예요. 연예인들과 몇 번 출장 갔다가, 수발만 들던 게 억울해서 배낭여행을 떠났겠죠. 긴 여행이 됐을 거예요.
MBC 개그맨 공채 시험에 합격했다면, 오래오래 개그맨 생활을 했을까?
붙었다면, 개그맨 생활은 꽤 오래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초반에 고비를 넘기기는 해야죠. 개그맨 군기가 그렇게나 세다면서요? 제가 아이디어는 있는 편이라, 코너 하나 정도는 히트시켰을 거예요. 초반엔 유재석보다 잘 나갔을 수도 있죠. 최종 시험을 기다릴 때, 대기실에서 누가 그랬어요.
-처음인데 1차 붙었으면, 몇 번만 하면 그냥 붙어요.
불확실한 기억이기는 한데, 개그맨 김대희였던 것 같아요. 불굴의 의지가 없었으니, 개그맨 운명은 아니었던 거죠. MBC PD 주철환이 저희 과 대선배예요.
-넌 다시 시험 보면 죽는다. 창피해서 못 보겠더라.
대선배님께서 친히 그리 말씀까지 해주셨는데, 어떻게 다시 문을 두드리겠냐고요?
서류 광탈, Mnet VJ, 붙었다면 정말 잘했을 텐데요
말로 하는 일은 좀 자신 있어요. 긴장감도 즐기는 편이고요. 할 말이 생각 안 난다. 저는 그게 어떤 감정인지 몰라요. 그런 적이 없어요. 머리가 하얗게 백지장이 된 적은 있죠. 사람 많은 무대에 올라서면요. 그런 때도 혀가 알아서 움직여요. 그냥 혀만 믿고 있으면, 기본은 해요. 이런 걸 타고났다고 하는 거겠죠? 학교 사진관에서, 증명사진 찍어서 원서를 냈어요. 연예인 외모여도 될까 말까인데, 지극히 평범한 외모에, 포토샵 제로의 청정 증명사진으로 합격을 꿈꾸다뇨? 그때도 전문 스튜디오에서 다들 각 잡고 사진 찍어서 원서 냈거든요. 응시할 때는 자신감이 넘쳤고, 떨어지고 나면 포기도 빨랐죠. 어떻게든 꼭 붙어야겠다. 그런 승부 근성이 있었다면, 저의 직업은 달라졌겠죠.
어떤 직업을 선택했든 간에, 지금의 내 모습으로 귀결되기는 했을 거예요. 약해 빠진 인간이라 적응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나답게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거죠. 끼도 참 많은 관종이, 저란 사람이었네요. 이렇게 글로 정리해 보니까요. 여러분은 과거에 대한 후회가 많나요? 어떤 선택을 하든, 가장 나다운 자신으로 정착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성공은, 합격은 순간일 뿐이고요. 결국 24시간을 채우는 건,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이죠. 그때 합격을 했더라도 잘 살았을 거예요. 그때 떨어졌지만, 잘 살고 있으니까요. 앞으로도 수많은 부침이 있겠지만, 저는 어디 도망 안 가요. 성공도, 실패도 저의 일부지, 전부는 아니니까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하루를 살아요. 그러면 괴로워야 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세상 공짜 없고, 하루 공짜 없요. 그걸 늘 명심하게 돼요. 매일 글 쓰는 시간이, 저를 감사하는 인간으로 만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