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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내가, 마흔여덟 살 나를 찾아온다면?

나는 그 애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요?

by 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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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상을 자주 하곤 해요. 과거의 나, 혹은 미래의 나와 만나는 상상요. 누가 아나요? 양자 컴퓨터가 상용화되면, 타임머신이 뚝딱 개발될지. 과거의 내가 저를 만나러 오는 것보다는,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를 만나러 가는 게 가능성이 높다네요. 방콕 스타벅스에 앉아 있는데, 털썩 스무 살의 제가 맞은편에 앉아요. 자신을 관찰자 시점으로 보는 게 처음이라서, 스무 살의 저를 보는 건 더더욱 처음이라서 많이 놀라겠죠. 아, 내가 이렇게 생겼구나. 생각보다 괜찮게 생겼네. 젊음이 이래서 좋아. 팽팽한 스무 살 피부에 감탄부터 하겠죠. 스무 살의 저는 제가 성공했는지가 가장 궁금할 거예요. 욕심 많은 아이였으니까요. 성공이 최고라고 생각하던 아이였으니까요. 스무 살이잖아요.


그 아이는 제가 마흔여덟 살이란 거에 놀랄 거예요. 자신이 생각했던 마흔여덟 살보다는 젊어 보이니까요. 할아버지에 가까울 줄 알았는데 여전히 아저씨여서 일단 안도할 거예요. 한 달 수입이 백만 원도 채 안 되는 글쟁이란 사실에 크게 실망하겠죠. 과외에 학원 알바까지 뛰었던 저의 스무 살은 평생 가장 부자였던 시기였죠. 한국이 아닌 태국에서 밀린 빨래를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도 성에 안 찰 거예요. 미국이나 유럽이 아니라 태국이요? 그 가난한 나라에서 뭐 볼 게 있다고 거지처럼 살까요? 한심하고, 못마땅하겠죠. 스무 살의 나를 위해 마키아또 벤티 사이즈를 주문해 줘요. 스타벅스란 게 있는지도 모르는 촌뜨기였을 테니까요. 우산 꽂은 파르페 한 잔이 최고의 사치라고 생각하던 아이였으니까요. 자신의 시간으로 돌아가면, 내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해요. 결론을 미리 알고 사는 것처럼 잔인한 삶이 또 있을까요? 큰 복일 수도 있죠. 스무 살까지는 살 수 있을까? 서른 살까지는 살 수 있을까? 늘 그런 의구심을 품던 아이였으니까요.


이제 이 아이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요?


-여전히 악몽을 많이 꾸니? 세상이 만만하다면서, 왜 늘 조바심에 끌려 다니니? 나는 누구보다 잘났어. 입으로만 나불대는 것도 사실 불안해서였던 거야. 너의 조급함이 너를 이리로 데리고 왔니? 이제 안심이 좀 되니? 실망했지? 영화감독이나 방송국 PD가 되어 있을 줄 알았어? 광고 카피 라이터? 너는 충분히 될 수 있어. 나를 만났다고 지금의 내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 되고 싶지 않다면, 안 될 수 있는 거야. 나는 수만 개의 미래 중 하나일 뿐이야. 너무 단정적인가?


-후회 없이, 큰 걸림돌 없이 성공하고 싶겠지. 지금의 나도 크게 다르지는 않아. 크게 휘청이지 않고 늙고 싶어. 안락하게 죽고 싶어. 가능해야 말이지. 그건 정말 운이야. 사고와 병이 나만 일부러 피하는 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욕심내지 마. 욕심내서 될 일이면, 욕심내라고 하지. 절대적 안락은 없어. 부자가 되고 싶으면 삼성전자 주식에 몰빵해. 경영학과 수업을 들을 때 교수님이 그렇게나 강조했던 거기도 해. 한 귀로 흘려 들었거든. 개포동 재건축 아파트를 땡빚을 내서 사든가. 괜히 말했다. 너란 놈이 욕심 많다는 걸 깜빡했네. 끝까지 밀어붙일 놈도 또 아니지. 주식 가격이 조금이라도 내리면 또 팔 걸? 나를 만난 걸 의심하면서 말이야. 의심도 너야. 결국엔 자기로 돌아오게 돼. 그러니까 미래를 미리 안다고, 더 행복해질 일은 없는 거지.


-좋은 소식 알려 줄까? 딱히 후회되는 삶을 살지 않았어. 힘들면 피했고, 못 견디겠으면 짐을 싸서 떠났어. 남들의 잔소리도 딱히 스트레스가 안 되더라. 지금의 내가 나에게는 최선이야. 정답만 골라서 산 것 같은 자부심이 있어.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정답은 아닐 거야. 돈? 빚은 없어. 부자이고 싶지? 돈은 많으면 좋지 않아. 이 말에 아마 나 말고, 대부분이 동의하지 않을 거야. 돈이 많다는 건 삼겹살을 먹고, 애플파이를 먹는 것과 같아. 불필요한 것들을 끊임없이 욕심내게 돼. 당장은 좋은 것 같지만, 트랜스 지방이 몸에 차곡차곡 쌓이게 되지. 이런 말은 돈 많은 사람이 해야 더 뽀대가 나지만, 내 말이라도 좀 귀담아 들어줘. 존재를 드러내고픈 욕망이 사실 돈과도 연결되어 있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승리니까. 성공의 상징이니까. 돈이 아닌 방식으로 존재를 드러낼 수만 있다면, 돈 욕심은 사그라들게 돼. 너를 표현하는데 과감해지렴. 그래, 후회되는 게 있다면 더 마음껏 나를 드러내지 못했다는 거. 뭐가 그리 무서웠던 걸까? 내장까지, 내장에 찌든 콜레스테롤까지 다 드러낼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완벽한 자유를 얻게 될 거야. 그 자유로 뭐든 해도 돼. 글을 써도 되고, 음치로 노래를 해도 돼. 만화를 그려도 좋고, 네가 만든 셔츠를 벼룩시장에서 팔아도 돼. 그럴듯한 것들은 필요 없어. 진짜여야 해. 네가 좋은 거, 네가 행복한 거를 팔아. 얼마를 버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뭘로 버는가가 중요해. 그리고 벌지 않는 시간이, 버는 시간만큼이나 소중하다는 걸, 실천으로 증명해. 떳떳하게 놀고, 죄책감 없이 쉬어. 그리고 네가 내 나이가 됐을 때, 한 번 더 나를 찾아 줘. 그때는 네가 내게 용기를 줘. 더, 더 자유롭게 살았더니, 그때의 당신보다 훨씬 빛나는 내가 될 수 있었다고. 이제라도 용기를 내서 훨훨 날아 보라고.


PS 매일 글을 씁니다. 제게 오셔서 잠시 쉬어 가세요.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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