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고 낮잠을 자면, 늦게까지 잠이 안 와요. 자지 말아야지. 자지 말아야지. 잤죠, 뭐. 몽롱해진 채 가벼운 후회를 해요. 새소리가 들려요. 오늘은 감자를 채 썰어서 볶아야겠어요. 어릴 때 어머니가 도시락 반찬으로 자주 싸주셨어요. 파래나 가지, 콩나물과 다르게 덜 가난해 보이는 반찬이었어요. 파래나, 가지, 콩나물을 싸주시면 종일 그렇게 우울하더라고요. 너네 집 반찬은 젓가락이 안 가. 그런 막말까지 들었던 터라, 예민해졌었나 봐요. 별다른 양념 없이 감자와 양파만 볶은 건데도 친구들이 그렇게 좋아하더라고요. 잘 사는 친구들이야 뺏기는 반찬이 스트레스였겠지만, 저 같은 경우엔 끝까지 방치되는 제 반찬이 서글픔이었죠. 감자도 있겠다, 양파도 있겠다. 가늘게, 가늘게 채를 썰어서 후다닥 볶아야겠어요. 별 거 아닌데, 반갑게 맛난 음식이 있죠. 감자채 볶음이 제게 그런 음식이에요.
무릎이 삐끗하고선, 운동을 쉬고 있어요. 얼마 전에는 앉았다 일어서기 천 개를 해냈지 뭡니까? 처음엔 열 개도 그리 힘들더니요. 올해 안에 사백 개만 하자. 4백 개는 한 달 만에 돌파하고, 두 달째에 천 개를 뚝딱 해치웠어요. 평생의 목표로 만 개 괜찮지 않나요? 여든 살이나, 아흔 살쯤에 이루려고요. 만 개를 할 정도면, 허벅지와 엉덩이가 얼마나 튼실한 노인이겠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삐끗하냐고요? 마음대로 되는 게 없어요. 잘 될 것 같았거든요. 이 기세로 쭉 나아갈 것만 같더니요. 다시 도돌이표가 됐어요. 그렇게 한 번 손을 놓으면, 아예 안 하게 되더라고요. 이렇게 늘어지는 기분도 운동 부족 탓이죠, 뭐.
방에서 새소리를 듣고 있어요. 새들이 싸우자는 식으로 꽥꽥거려요. 이런 소리에 익숙해져 있어서요. 소리를 인식할 때, 멀리 와 있구나. 주위가 갑자기 낯설어져요. 내가 어떻게 이곳에 있게 된 거지? 마술 같아요. 평소에 태국을 동경했나? 전혀요. 오자마자 너무 좋았나? 아니요. 스며들었어요. 따뜻한 날씨에, 느린 사람들에, 쌀국수에, 망고의 향기에요. 갑자기 인도 절대 가지 말라던 유튜버가 떠올라요. 자신도 안 가봤지만, 쓰레기 같은 나라 제발 좀 가지 말아라. 조회수가 이백만 명에 육박하더군요. 왜 간 사람 말고, 안 간 사람의 목소리가 더 클까? 흥미롭지 않나요? 가본 저는 닥치고 있으려고요. 두 달 정도 있었다고, 뭘 알겠어요? 그런 말을 하는 게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고요. 인도 좋은 나라니까 강추합니다. 그런 배짱도 없어요.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나라라고 생각해요. 아예 안 가서 안전한 삶도 좋죠.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곳이 될 수도 있어요. 본인의 선택인 건데, 고민조차 하지 말아라. 그런 강경한 발언이 지지를 받고 있어요.
하긴 저도 남미를 가야 하나? 끝까지 고민했더랬죠. 저 같은 경우엔 가본 사람들조차 말렸어요. 너무너무 위험한 곳이라고 했어요. 깡다구가 있어서 강행한 게 아니라요. 가겠다고 설레발을 너무 쳐놔서 갔어요. 환송회도 여러 번 했고요. 선물과 돈도 꽤 받았어요. 목숨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지만, 그런 것들로 목숨을 걸게 돼요. 결과적으로 목숨을 걸 만큼 무시무시한 곳은 아니었으니까요. 네, 치안 안 좋아요. 현지인들조차 창살까지 설치하고, 강도들을 대비하는 곳이에요. 맥도널드 앞을 총든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죠. 두 번이나 강도를 당했어요. 그러니까 운이 없으면 당하는 정도는 넘어선 거죠. 그래서 가지 말아야 하는 곳일까? 그건 각자의 선택이죠. 제 책 '1만 시간 동안의 남미'를 읽고, 남미로 이민 가신 분도 계세요. 고맙다더군요. 행복하대요. 남미가 자신과 잘 맞는대요. 멕시코에서 만났던 일본인 친구는 콜롬비아에서 변사체로 발견됐어요. 평소에도 마약을 즐겨했던 친구인데, 정확한 사인은 저도 몰라요.
자동차 사고가 많으니 차를 사지 마세요.
조난 사고가 많으니 등산을 하지 마세요.
익사하기 싫으면 물에 얼씬도 마세요.
이 말은 억지인가요? 억지 아니죠. 우리는 최악의 상황을 알지만, 자동차를 사고, 산에 오르고, 바다로 뛰어들어요. 그것들이 주는 자유와 행복감을 아니까요. 모든 선택엔 그렇게 위험도 곁들여 있어요. 그것이 두려워서 포기하는 것도 본인의 자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하는 것 역시 본인의 자유예요.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다면, 타인의 여행에 비수를 꽂는 것만큼은 자제해야죠. 모두 자신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니까요. 정보로만 그 세상을 안다는 건, 물을 마셔보지도, 들어가 보지도 않고 물을 안다는 것과 같아요. 세상은 단어가 아니에요. 글자가 아니에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글을 쓰기 전엔 아무것도 없었어요. 글을 쓰고 나면, 글이 있어요. 신기하지 않나요? 너무 대단한 기적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매일 기적 속에 살 수 있어요. 매일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