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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Dec 01. 2020

TV 여행 프로그램에 출연한다는 것

텔레비전에 내가 나와서 정말 좋지만은 않습니다

가문의 영광 맞죠. EBS 세계 테마 기행만 여섯 번 출연했어요. 그렇게들 부러워하더라고요. 감사하고, 소중한 경험이라고 저도 생각해요. 놀고먹는 걸로 오해하시더라고요. 그런 생각으로 출연하시면, 피눈물 흘리실 수 있어요. 세상 공짜 없는데, 방송이라고 예외겠어요? 마음껏 돌아다니면, 제작진이 알아서 찍고, 편집해 주는 줄 아셨죠? 미리 짜 놓은 스케줄에, 현장에서 마주친 상황(예를 들면 결혼식, 잔치)을 쉴 새 없이 찍어요. 잠들기 전까지는 계속 촬영한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일출을 찍어야 할 때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나야 해요. 20일 정도 찍는데, 휴식은 폭우가 쏟아질 때뿐이죠. 편하게, 느긋하게 잘 놀다가 오는 신선놀음은 없어요. 초기에 그래서 남성 출연자들이 많았어요. 체력적인 문제 때문이죠. 콜롬비아 정글 트레킹을 하루 늦게 출발해야 했어요. 저도, 제작진도 배탈이 난 거예요. 이틀 거리를 하루 만에 주파해야 했어요. 빛 하나 없는 깜깜한 정글을 랜턴 하나 의지해서 걷는 거예요. 조심조심 걸어도 위험한데, 천천히 걷다가는 길바닥에서 자야 해요. 배탈로 기진맥진한 몸으로 밤 열 시까지 정글을 헤맸어요. 발을 헛디뎌서 벼랑으로 쑥 빨려 들어갔던, 위험천만의 순간도 있었죠. 에콰도르에서는 해발 6천 미터 산을 하루 만에 올라갔다 내려왔어요. 저처럼 등반 경험도 없는 생초보가요. 입술은 보랏빛으로 죽어가고, 두통에, 호흡 곤란에 사지가 다 떨렀죠. 제가 퍼지면, 하루를 공치고, 방송에 나갈 콘텐츠가 사라져요. 촬영하다가 왜 사고가 나는지 아시겠죠?


게다가 자신의 몰골을 화면으로 확인해야 해요. 이게 촬영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어요. 우리는 보통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내 모습일 거라고 착각하죠. 본능적으로 가장 예쁜 각도에서, 가장 보기 좋은 표정을 지어요. 난 이렇게 생겼군. 아니에요. 거울 속 자신은 안구 포샵이 들어간 거예요. 우리는 훨씬 더 못 생겼어요. 연예인은 그냥 예쁘고, 잘 생긴 게 아니라 360도 어디에서 봐도, 각이 나오는 두상을 지녔죠. 그래서 연예인인 거예요. 그래서 예쁘고, 잘생긴 거예요. 평소에는 절대로 볼 일 없는 옆모습, 뒷모습, 대각선 측면 모습을 TV로 고통스럽게 봐야 해요. 내레이션까지 본인이 하니까, 자신의 역한 목소리도 들어야 해요. 고문이 따로 없어요. 추석 때 큰집에서 온 가족이 제가 나온 걸 함께 보는 거예요. 하필 그때 재방송을 해주더라고요. 저는 십 분도 못 보고, 나왔습니다.


약국에서 입술 물집 연고 좀 달라고 했더니, 헤르페스라고 하는 거예요. 방송 나온 분 맞죠? 약사가 의미 심장한 웃음을 지으면서요. 반가워서 웃은 거겠지만, 괜히 얼굴이 화끈 거리는 거예요. 입술 포진은 헤르페스 1형이고, 성기 주변 포진이 2형이죠. 보통 성병은 2형 헤르페스죠. 그런데도 저 아니거든요. 결백함을 주장하고 싶은 거예요. 에휴. 누가 제 입술 따위에 관심이나 있다고, 그렇게 혼자 오버를 하더라니까요. 국민하교 짝꿍, 군대 후임 등 소식 끊긴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다 오고요. 운이 좋으면 CF 섭외도 들어와요. 생수 CF였는데 무려 2천만 원을 주기로 해놓고, 다른 사람으로 바꾸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니까 여러 후보 중 한 명이었던 것 같아요.


출연자도 힘들지만, 제작진은 두세 배 더 힘들어요. 대부분 외주 제작이에요. 방송국에서 만드는 게 아니라, 여러 제작사가 납품을 해요. 당연히 제작사끼리 경쟁이 붙죠. 재계약을 따내려면, 잘 만들어야 하니까요. 그렇게 을이 된 제작사는, 피를 말려가며 만들어요. 저는 출연만 했는데도, 혼이 나갈 것처럼 힘들었어요. 그래도 일과 끝나면 쉴 수나 있죠. 제작진은 촬영한 거 싹 다 저장하고, 장비 점검하고, 충전하고 자야 해요. 촬영이 끝나면 홀가분하게 쉬냐고요? 더 고통스러운 편집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죠. 라꾸라꾸에서 자면서 열흘 이상을 골방에 처박혀서 편집만 해요. 여러분이 보는 세계 테마 기행은 그렇게 해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부러워만 하지 마시라고요. 놀고먹는 신선놀음은 절대 아닙니다. 대신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아름다운 곳을 소개하는 영광이 있죠. 조금은 경건한 마음으로 봐주세요. 우아하게, 안락하게 여행하는 것 같지만, 집에 가고 싶고, 엄마 보고 싶은 출연자들이 고군분투하면서 찍는 거니까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어떤 사람이 부럽냐면, 자유로운 사람이 부럽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럽냐면, 걱정 없는 사람이 부럽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닮아가고 싶습니다. 부러운 사람들처럼 되고 싶어요.


PS 정기구독 신청하시고, 메일 못 받아보신 분들 modiano99@naver.com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2월 연재 이미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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