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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우 Dec 03. 2020

내가 어른이 됐다고 느꼈을 때

영원히 아이인 채로 죽을 것 같지만요

내일모레면 오십인데, 좀 웃기죠? 가끔은 제 나이가 낯설어요. 조선시대면 손주도 봤을 나이인데, 내가 어른이 맞나? 의심스러워요. 결혼도 안 해서 더 그런가 봐요. 책임질 게 없으니, 어른이란 단어에 좀 미안하기도 하고요. 이상하게 모임에서도 막내일 때가 많았어요. 고기도 제가 뒤집은 적이 별로 없어요. 뭐만 하면 속이 터지나 봐요. 고기 집게를 잡게 놔두지를 않더군요. 어리광 부리는 막내였을 때가 좋았죠. 내가 어른이 된 건가? 그런 기분이 들었던 때를 떠올려 봐요.      


1. 물냉면의 맛에 눈을 떴을 때      


전 물냉면이 냉면에 그냥 생수를 들이부은 건 줄 알았어요. 어머니가 맛 좀 보라고 할 때도 기겁을 했죠. 어른은 맹물에 면만 담가도 맛을 느끼나 보다. 우울하고, 금욕적인 세계구나. 그런 어른들의 세상이 내게 오지 않기를 바랐죠. 대학생이 돼서 물냉면을 처음 먹었어요. MSG로 떡칠을 한 학교 물냉면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더군요. 600원 정도 했을 거예요. 이제는 물냉면 아홉 번 먹으면, 비빔냉면 한 번 주문할까 말까죠. 비빔냉면과 멀어지는 건 자극적인 맛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는 거 아닐까요? 물냉면 = 어른 맛. 그런 공식이 저에게는 있어요.      


2. 호텔 수영장을 쳐다도 보지 않게 됐을 때      


어른이라도 수영 좋아하는 사람 많죠. 어릴 때는 그렇게 수영장을 좋아하더니요. 수영장에서 나는 유한락스 냄새까지 사랑하던 아이는, 어쩐 일인지 물에 들어가는 일이 뜸해져요. 보는 것까지만 좋아요. 아주 좋아요. 물속으로 들어가고, 나와서 샤워하고, 방에 들어가서 또 샤워하고, 바다면 모래까지 깔끔하게 털어야 하고. 이런 과정이 다 귀찮기만 해요. 대신 산이 좋아져요. 산에서 맡는 깔끔한 아침 공기, 그거 하나면 열 시간 이상 걸려도 갈 마음 있어요. 아침에 피어오르는 산안개에 휩싸여서 오들오들 떠는 걸 좋아해요. 그때 먹는 컵라면이 세상 제일 맛있는 음식이죠. 산속에 있으면 갇혀 있다는 느낌보다는, 포근히 안긴 느낌이 들어요. 왠지 몸에도 더 좋은 것 같고요.      


3. 기다려지는 날이 없어졌을 때     


방학이라든지, 크리스마스만 생각하면 심장이 콩닥콩닥 뛸 때가 있었죠. 소풍 전날엔 비가 올까 봐 잠을 설쳤고요. 소풍날 김밥 참기름 냄새에 저절로 눈이 떠졌죠. 어머니가 마는 김밥의 꽁다리를 주워 먹을 때, 그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돌이켜보면 소풍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그냥 어딘가를 갔다가 온 게 전부잖아요. 그래도 소풍이란 단어가 그냥 마법이었어요. 지금 저에겐 기다려지는 날이 없어요. 명절은 오히려 부담스럽기만 해요. 친척들이 결혼이나, 제 미래에 대해 궁금하지만 꾹 참는 모습까지 다 읽혀요. 명절 때는 어떻게든 한국에 안 있으려고 해요. 제가 여행하며 사는 건, 일부러라도 기다려지는 날을 만들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어요. 짐을 싸고, 빠진 거 없나 점검하고, 공항버스를 타고 인천 바다를 바라볼 땐 가슴이 뛰어요. 어릴 때만큼은 아니더라도요.      


4. 고기보다 회가 좋아졌을 때     


어릴 때는 무조건 고기였죠. 대학생 때도 제육볶음을 가장 많이 먹었어요. 한참 대패 삼겹살이 대유행이었는데, 이게 고기인지 솜사탕인지 먹기는 하는데, 배는 안 부른 거예요. 싼 맛에 4인분, 5인분 입에 넣기는 하는데 양이 차야 말이죠. 왕성한 호르몬도 육식에 영향을 미치나 봐요. 뭐든 먹으면, 금세 배가 고파지는 나이였으니까요. 든든한 고기가 최고였죠. 지금도 고기를 먹지만, 제 의지로 고깃집을 가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삼겹살이나 안심, 등심이 먹고 싶어 군침이 돌지는 않아요. 대신 해산물은 맛있어요. 회나, 꽃게찜, 초밥은 비싸서 못 먹을 뿐이죠. 요즘엔 해산물 사랑도 시들해지고 있어요. 그렇다고 채식주의자가 될 것 같지는 또 않아요. 맛보다는 균형 잡힌 영향을 섭취하는 쪽으로 식습관이 바뀌고 있어요. 일단 소화력도 예전만 못하고요. 맛의 즐거움과 결별하는 것. 이게 또 슬픈 어른의 입문 과정인가 싶기도 하고요.    

  

5. 소녀시대가 후배들에게 구십도 인사받는 걸 볼 때    

  

소녀시대뿐이겠어요? 거장 대접을 받는 박효신이나 지드래곤도요. 저는 신인 때를 기억하니까요. 선배들에게 배꼽 인사를 하고, 리얼리티 쇼에서 어떻게든 뜨고 싶다는 의지를 숨기지 않았죠. 나도 저런 대스타가 될 수 있을까? 의심과 욕망이 뒤섞인 채, 개인기도 시키기만 하면 다 했죠. 춤도 추고, 성대모사도 하고요. 지금은 그런 걸 할 이유가 없죠. 정상을 찍은 연예인 중의 연예인이 됐으니까요. 후배들이 꿈꾸는 워너비가 됐으니까요. 무슨 옷을 입든 감탄하고, 따라하고 싶은 최고가 됐으니까요. 꼬꼬마 신인들이 원로가 됐으니, 저는 얼마나 늙었다는 걸까요? 마지막 예비군 훈련을 끝냈을 때, 처음 신용카드를 긁었을 때, 처음으로 칵테일을 주문했을 때(하루키 소설을 읽고 일부러 피나 콜라다를 주문했었죠), 백화점에서 지오다노가 아니라 폴로 랠프로렌 셔츠를 샀을 때, 이가 시릴 때, 무릎 관절을 삐끗했을 때, 온탕 말고 열탕에서도 끄떡없을 때, 발목 위로 올라오는 양말을 샀을 때, 연양갱이 맛있어졌을 때 어른이 됐음을 실감해요. 필러와 지방이식으로 볼이 빵빵해지면 다시 어려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이젠 어른이 아니라, 노인이 되어가고 있는 거죠. 어른이 되기 전에 노화가 먼저 온 것 같아서 당혹스러워요. 할아버지는 됐는데, 여전히 어른 같지 않은 어른이 된 것 같아 겁이 덜컥 나기도 하고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누가 쓰라고 한 적 없어서, 오히려 열심히 쓰고 있어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욕망을 꿈꿉니다. 세상이 나의 사고와 가치관을 조종하고 있다. 이런 의심이 있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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