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나는 캄캄한 운동장에 그어진 트랙을 따라 걸었다. 춥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신이 교복 재킷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쳤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뭔가 다 어색하게만 느껴져 입을 다물었다. 원형의 트랙은 끝이 없었다. 그 핑계로 계속 걸을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손을 잡고 걸었다. A의 편지를 전한 참이었다. 분명 장난스러운 분위기로 시작된 것 같은데 어쩌다 밤이 되도록 그런 분위기로 걸은 것인지 흐릿하다. 다음날 나는 신과 사귀게 되었다고 A에게 솔직히 말했다. A는 한동안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A와 신과 나는 고스란히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A는 고등학교에서도 금사빠였고, 나는 지은 죄가 있어서 더욱 열심히 그녀의 메신저 노릇을 했다. 그리고 신과의 연애도 열심히 하고 싶었는데 초등학교 시절 글쓰기처럼 잘 되질 않았다. 뭔가 할 때는 해서 어색했고, 안 할 때는 안 해서 어색했다.
아침 7시에 학교에 가서 밤 9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독서실에 가서 자정이나 새벽 두 시까지 공부하는 나날들이 시작됐다. 우리는 학교 복도나 독서실에서 잠깐씩 보는 사이였다. 사귀는 게 이렇게 별거 없나 싶게 친구 같았다. 그렇게 몇 달을 지내다 헤어졌다. 이 날의 기억도 흐릿하다. 대체 나와 신은 어떤 말을 주고받으며 시작하고 끝났을까.
고 2가 되어 신과 같은 반이 됐고, 신은 다른 여자애와 사귀기 시작했다. 대외적으로 나와 신은 고 1 때 몇 달 사귄 게 전부였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헤어지고 신을 더 좋아하고 있었다. 사귀는 동안에 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좋아한다는 말 같은 것도 못했다. A는 가끔씩 내가 신을 잊지 못하는 게 아닌지 확인하는 질문을 던졌지만 나는 미끼를 물지 않았다. 같은 반 남자애에게 고백을 받기도 했는데 관심이 가질 않았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매일 조금씩 신을 더 좋아했다.
학교 문예지에 내 글이 오른 적이 있었다. 내 시가 적힌 페이지를 펴니 바로 옆 페이지에 신이 쓴 시가 적혀 있었다. 신이 나와 사귀던 때 편지에 적어준 촛불이라는 시였다. 선배의 부탁으로 학교 축제 사회를 수락했는데 알고 보니 이미 내정된 다른 사회자가 신이었던 적도 있었다. 우리는 초등학교 때처럼 텅 빈 교실에서 단둘이 사회자 대본을 만들고 커플룩을 입고 사회를 봤다. 이게 다 신이 다른 애와 사귀는 동안 일어난 일이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우리는 멀어졌다. 그렇다고 생각하며 지냈다. 대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 신에게 연락이 왔다. 술집에 앉아 마주 보니 이상했다. 이제 각자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구나 싶었다. 술을 몇 잔 넘기고 우리는 처음으로 솔직한 대화를 나눴다. 신은 내게 왜 이제야 솔직하냐고 했다. 진작에 이랬으면 우리가 안 헤어졌을 거라고도 말했다. 그리고 남자 친구가 생겼으면서 왜 이 자리에 나왔냐고 물었다.
이유는 나도 몰랐다. 별명을 지을 때 벌레 새끼라는 단어가 거침없이 튀어나올 만큼 신에게 내적인 벽이 없었다. 그렇게 친밀한 느낌을 주는 사람은 신이 처음이었다. 그날 나는 전하지 못했던 그런 마음들을 모두 쏟아냈다. 그리고 나쁘게도 이제 막 좋아진 남자 친구가 있어서 미련 없이 돌아 나올 수 있었다.
오늘 영화 러브레터를 다시 봤다. 저기 막 좋아진남자 친구와 2000년에 봤으니 20년 만이다. 순식간에 이렇게 적고 있을 만큼 영화의 모든 게 어린 시절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그렇게 긴 시간을 함께 한 신과 그가 보낸 그 많은 편지를 어떻게 잊고 살았지. 잘 지낼까? 이제는 알 길이 없으니 과거에게 물어본다. 잘 지내? 그러면 우리의 어린 마음들은 마음대로 되지 않아 불만인 채로, 뭘 잘 모르는 채로 그렇게, 잘 지내요 대답해 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