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상담의 기록 1

능숙하게 하던 일을 전혀 할 수 없어서 찾아갔다

by 모노


다시 우울해졌다. 기분이 좀 안 좋다. 좀 가라앉는다. 정도가 아니라, 기분이 안 좋아서 죽어 버리는 게 나을 것 같다, 마음이 무거워 지각과 멘틀을 뚫고 핵까지 가라앉을 것 같다, 능숙하게 하던 일을 전혀 할 수가 없다, 이렇게 느릿느릿한 달팽이로 아스팔트 위를 기어 다니느니 행인 발에 밟혀 사라지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루 종일 하는 상태이다. 누워만 있고 싶은데 살기 위해 출근을 하고 꾸역꾸역 서류를 본다. 그러니 미칠 노릇이지. 아니면 이미 미친 건가. 우울증 약을 이미 두 달째 먹고 있는데 이번엔 별로 효과가 없다. 약들아 왜 힘을 못 쓰니.

이번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심리 상담을 받으러 갔다. 첫날엔 전반적인 상태에 대해서 가볍게 얘기했다. 얘기하는 것만으로 약간 마음이 가벼워졌다. 상담사는 내 마음속을 좀 더 들여다보자며 다면적 인성검사와 문장 완성형 검사를 제안했다. 집에 와서 보니 다면적 인성검사는 567문항이나 되었다. 가능한 한 번에 작성하라고 했는데 도저히 집중이 되질 않았다. 반 정도 하다가 덮어 놓고 지내니 상담센터에서 검사지 작성했으면 보내달라고 문자가 왔다. 문자를 받고서 또 꾸역꾸역 검사지를 작성했다. 더럽게 많네 소리가 절로 나왔다. 문장 완성형 검사는 괄호를 채우는 거였다.


나에게 이상한 일이 생겼을 때 ( ), 내 생각에 가끔 아버지는 ( ), 내가 바라는 여인상은 ( ), 내가 믿고 있는 내 능력은 ( ), 결혼 생활에 대한 나의 생각은 ( )…. 이런 것들이 나의 어떤 부분을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냥 대충 휘리릭 채웠다. 대충 하기도 버거웠다. 내 상태가 그랬다.

다시 상담 날이 되었다. 상담사는 내 인생 이야기를 들려달라며 종이를 한 장 꺼냈다. 기억하는 가장 어렸을 때의 순간을 떠올려 보고 그때의 기분을 1에서 10점 사이의 점수로 말해보라고 했다.


내가 세 살 되는 해에 동생이 태어났다. 동생을 낳으러 엄마 아빠가 병원에 간 동안 친할머니가 나를 봐주셨는데 흔들의자에 앉아서 나를 재우다 할머니가 잠이 든 거다. 할머니 무릎에서 기어 내려와 나는 대문을 열고 걸어 나갔다. 걷고 걸어 꽤 멀리 시장까지 갔다고 한다. 이미 엉엉 울면서 걷고 있었던 모양인데 우연히 시장에 나온 같은 동네 아줌마가 나를 보고 OO 아니니? 하시곤 집까지 데려다주셨다고 한다. 그 동네 아줌마가 아니었으면 고아원에 갔을 수도 있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자라면서 종종 들었는데 할머니 무릎에서 내려와 시장으로 가는 길을 걷던 장면이 생각난다. 이게 내 기억인지, 부모님께 들은 얘기로 상상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기억이 나서 상담사에게 얘기했다. 그때의 기분이 생각나냐고 해서 안 난다고 했다. 그럼 지금 상상해보면 내가 어땠을 것 같냐고 물었다. 집에 돌아왔으니 별 생각이 안 든다고 대답했다.

그런 식으로 초등학교 1-2학년, 3-4학년, 5-6학년,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결혼 후, 지금까지 기억나는 사건과 기분과 기분을 색으로 표현하라는 질문을 받았다. 간단히 얘기하는데도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상담사의 간단한 총평은 이랬다. 내가 매우 감성적인 사람인데 어릴 때 이러저러한 이유로 필요한 만큼의 애착이 형성되지 않아서 그것이 계속 건드려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마음속에 감정이 있는데 그것을 표현하는 법을 몰라서 답답한 상태가 지금의 상태 같다고 했다. 간략히 쓰자니 누구나 할 수 있을 법한 얘기 같은데, 내 인생 사건을 들며 설명해 주니 꽤 와닿았다.


감정이 있는 데 그게 뭔지 모르는 상태라. 이 표현이 맘에 들었다. 정말 모르겠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내가 목표로 한 것을 대체로 가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공허하고 힘든지 알 수가 없다. 상담사는 감정을 두드려 꺼내는 연습을 해보자고 했다. 나는 어떻게 감정을 꺼내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상담사는 한 주동안 일하다가 생활하다가 문득문득 떠오르는 감정에 관해 작은 것이라도 기억해두었다가 알려달라고 했다. 주로 부정적인 감정이 떠오를 거라고 하면서 천천히 해보자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상담실을 나와 집으로 오는데 대학교 신입생 시절부터 2년을 만난 남친이 떠올랐다. 그 남자 친구가 군대 간지 6개월 만에 내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 그 남친에 대해서도 얘기했는데 '기억해보면 그 친구랑 한 것 중에 나쁜 게 없어요. 그 친구랑 만나는 동안 다 좋았어요'라고 말했다. 말하고서 더 알았다. 아. 내가 그 친구랑 정말 좋은 시간을 보냈구나. 내 스무 살이 그 친구로 인해서 굉장히 사랑받고 행복했구나. 근데 내가 너무 쉽게 다른 사람으로 갈아탔구나 알았다.


연애를 한창 하던 시절에 나는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옮겨가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순간순간에 외로움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나 좋다고 하면 만났다. 헤어지고 혼자 보내는 시간 같은 게 별로 없었다. 그 모든 관계들이 제대로 끝맺어지지 않고 내 마음속에 어떤 형태로 남아있으면 어쩌지 괜히 불안해졌다. 이런 마음에 대해서도 다음 주에 얘기해 봐야겠다.

다음 주엔 내가 작성한 567항의 다면적 인성 검사에 대해 알려준다고 했다. 도대체 그게 뭘 보여줄지 매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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