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상담의 기록 2

신발 닦을 힘이 생겼다

by 모노


출근길 아파트 단지 안에서 달팽이를 만났다. 지난주에 우울증 때문에 느릿느릿한 달팽이로 사느니 밟혀 죽고 싶다고 쓴 뒤라 그런지 기분이 이상했다. 사진을 한 장 찍은 뒤 풀섶 위로 옮겨 놨다. 누가 지나가다 밟기라도 할까 봐 걱정됐다. 달팽이도 나도, 사실은 잘 살아가길 바란다. 그래서 약도 먹고 상담도 받고 이렇게 글도 쓰고 있겠지.



어제 세 번째 상담을 갔다. 회사를 나서려는데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가기 싫은 마음이 일었다. 우산을 챙겨 들고 걸음을 재촉하다가 보도블록을 잘못 밟아 신발이 흠뻑 젖었다. 다시 가기 싫은 마음이 일었다. 센터 건물로 들어가 화장실에 가서 젖은 신발을 닦았다. 지난주라면 신발이 푹 젖은 순간 방향을 틀어 집으로 갔을 것 같다. 일주일새 신발을 닦을 힘이 생긴 것 같아 살짝 기분이았다.

상담사는 한주 동안 기분 좋았거나 나빴던 순간이 있었냐고 물었다. 지난주에 상담받고 돌아가면서 옛날에 만났던 사람들과 어른스럽게 끝맺고 헤어지지 못한 것들이 후회됐다, 남편이 딸과 구구단을 외우는 소리가 방 너머로 들리는데 매우 안심이 됐다, 필라테스를 하고 나오는데 몸이 뻐근하면서 살아있는 느낌이 들었다는 얘기를 했다. 상담사는 그런 감정들이 올라온 것이 아주 좋은 거라고 말했다.

그리곤 사람 얼굴이 그려진 A4 종이를 꺼내면서 엄마 아빠의 장단점을 적어 보라고 했다. 장점도 많고 단점은 더 많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적으려니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의 장점: 부지런하다 요리를 잘한다 성실하다 돈 관리를 잘한다 칭찬을 많이 한다.
엄마의 단점: 가스불에 대한 강박증이 있다 규칙이 많다 잔소리가 심하다 뭐든지 빨리 하려고 한다.
아빠의 장점: 길 눈이 밝다 글씨를 잘 쓴다 사교성이 좋다 영어를 잘한다
아빠의 단점: 책임감이 없다 술 담배를 많이 한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뭐라고 엄마 아빠 장단점을 적고 있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상담사는 A4 한 장을 더 주면서 나와 남편의 장단점을 적으라고 했다.


나의 장점: 성실하다 남의 장점을 잘 캐치한다.
나의 단점: 비관적이다 소심하다 비실비실하다.
남편의 장점: 돈 관리를 잘한다 성실하다 딸에게 자상하다.
남편의 단점: 감정 표현이 한정적이다 느리다 너무 오래 씻는다

내가 쓴 단어 하나하나에 질문이 이어졌다. 이건 무슨 뜻인가요, 어떤 의미로 쓴 건가요, 이걸 보면 어떤 기분이 드나요 등등. 내 답을 찬찬히 들은 상담사는 내가 아직 어린 딸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며 그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고 했다.


성장의 관점에서 보면 빠른 것보다는 느린 것이 좋은데 뭐든지 빨리 하라고 하는 부모님 밑에서 불안이 생겼을 수도 있다고 했다. 엄마는 뭐든지 후다닥 하신다. 요리도 청소도 후다닥 후다닥. 그래서 가끔은 마법사 같다. 조금 움직이신 것 같은데 요리가 짠하고 나오고 집안이 짠하고 깨끗해진다. 그런 엄마는 내가 느리다고 종종 타박하셨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서 너무 황당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내가 빠른 사람인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빠를 필요야 없지만 남들보다 느리다고 이십 대 초반까지 불안해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새로운 가족을 이룬 어른의 역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남편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물으셨고 우리 관계에서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자세히 조언해주셨다. 이 부분이 좀 재밌었는데 너무 개인적인 내용이라 적지 못해 아쉽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어른으로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봤다. 누구에게 확인받을 필요 없이 내가 어른스럽게 살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른의 삶이 이렇게 독립적이지 못하고 주변을 의식하고 전전긍긍하는 것일 리는 없겠지. 하지만 모두가 어느 정도는 전전긍긍하면서 산다는 것도 안다. 아는 만큼 좀 자라서 어깨도 마음도 가볍게 살고 싶다. 이젠 정말..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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