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장면은 수채화가 될까

배달 커피의 추억

by 모노

오랜 시간 우울과 지내다 보니 이제는 우울증의 낌새를 알아챈다. 편두통 전조 증상 같은 거랄까.


모든 것은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의식하지 못했는데 머리카락을 뽑고 있으면 시작된 거다. 일에 집중하는 시간이 줄고 효율이 떨어지는 건 기본이며 누군가를 미워하기까지 한다. 보통은 관심 없던 것들이 거슬려서 그 생각만 하고 있다. 사람에게 주로 드는 감정인데 물건이나 상황일 때도 있다.

그날도 일 때문에 이메일을 주고받다가 누군가가 미워졌다. 그런데 다음날 눈 떠서 제일 먼저 그 누군가를 떠올리며 계속 미워하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바로 병원에 가서 약을 타 왔다. 일 년에 서너 달 정도 약을 먹는 것 같다. 먹으면서도 괜찮아질 때까지는 졸고 미워하고 머리카락을 뽑으며 견딘다.


얼마 전 비가 많이 오던 날도 그랬다. 집중이 안 되고, 졸리고, 이런 내가 잉여 인간 같고, 그래서 머리를 쥐어뜯는 반복이었다. 그러다가 다른 건물에 근무하는 같은 회사 선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선배 너무 힘들어요. 블라블라…

집중이 안 돼요 블라블라…'


선배는 내가 지금 커피를 사들고 너네 빌딩으로 갈 테니 뭘 마실 건지 말하라고 했다. 뭉클했다. 비 오는 날 다른 빌딩까지 커피라니.


우리는 문이 열린 빌딩의 로비 의자에 앉아서 비바람을 느끼며 커피를 마셨다. 선배는 내 고민 같은 건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이 자기가 요즘 그리고 있는 그림에 대해서 얘기했다.


나는 선배의 그림을 안다. 내 숨 쉴 곳이 글쓰기 듯이, 선배는 그림을 그리며 숨을 쉬고 있었다. 우리는 대화를 하는 듯 마는 듯 하면서 30분쯤 앉아 있었다. 직장인의 티타임으로는 긴 시간이었지만 그날은 그냥 그러고 있었다. 마침내 선배가 먼저 자리를 뜨며 말했다.



어느 날 회사를 떠난다면, 매일 들여다 본 서류 더미나 괴롭히던 인간들이 아니라,
오늘 나랑 마신 커피나 분위기 같은 게 기억에 남을 거야



뒤돌아 사무실로 올라오는데 마음이 뭉클했다. 내가 우울증인 건 참 안 된 일이지만, 이런 선배가 곁에 있다는 건, 비 오는 날 배달된 커피만큼, 행운이다.


남은 오후엔 일을 할 수 있었다. 약으로도 안 되는 걸 선배가 해줬다. 다시 뭔가 써볼 마음도 생겼다.



아무거나 쓰다 보면 어느 날 그 글은 소설이 되기도,
시가 되기도 한다. 일기는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일기가 집이라면 소설이나 시는 방이다.
일기라는 집에 살면 언제든 소설이라는 방으로,
시라는 방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문보영 '일기의 시대'


오늘 내가 쓰는 이 글은 뭐가 될까. 선배와의 장면은 훗날 무엇이 될까. 소설이 될까. 일기로 남을까. 아니면 수채화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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