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노 Apr 25. 2024

복싱하는 여자

불안이 밀려오는 날에는 운동을 결제해

코로나 기간 동안 필라테스를 했다. 2년이 넘어가자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뭔가 활동적인 운동을 하고 싶던 차에 남편이 복싱을 권했다. 복싱? 별로 내키지 않았는데 은총이가 '나도 할래!'라며 의지를 보였다. 자기는 액션 배우가 될 것이기 때문에 복싱을 배워야 한다는 논리였다. 복싱은 별로지만 은총이와 같이 운동하는 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2023년 10월부터 우리 가족 세 명은 복싱의 세계로 들어갔다.


복싱장에 가서 정각이 되면 가벼운 몸풀기부터 시작다.


구령에 맞춰 머리 어깨 무릎 발을 풀고, 팔 벌려 뛰기를 하고 복싱장을 돈다. 커버를 올리고 잽을 날리면서 한 바퀴, 발을 교차시키면서 한 바퀴, 바닥을 터치하면서 한 바퀴, 이런 식으로 대여섯 바퀴를 돈다. 그리고 추가로 복싱장을 12바퀴 돈다. 여기까지 하는데 20분이 소요된다.


이 정도를 하면 나는 이미 만신창이가 된다. 그러나 줄넘기가 남아 있다. 2분 줄넘기 1분 휴식. 이 동작을 4세트 반복해야 한다. 그렇게 30분이 되고서야 복싱 동작 레슨이 시작된다.


처음엔 '잽'과 '원투'를 배웠다. '잽'은 팔을 짧게 내밀면서 하는 펀치이고, '원'은 왼손을 앞으로 뻗는 기술, '투'는 오른손을 뻗는 기술이었다. 이 과정에서 사선으로 서서 스텝을 앞뒤로 밟아야 하는데 이게 정말 힘들다. 내 체력으로는 스텝만 밟기도 힘들었다. 나는 땀이 없는 편인데 복싱장에 다녀오면 땀 범벅이 되었다. 헉헉대며 운동하는 쾌감이 있었다.


조금 더 끈기를 발휘했더라면 힘듦이 덜했을까? 운동이 힘든만큼 개운한 기분이 좋았지만 귀차니즘이 우리 가족을 이겼다. 복싱 끝내고 먹는 닭꼬치와 맥주도 귀차니즘을 이기지 못해 결국 한 달을 쉬었다.


첫날에 세 달치를 결제한 상황에 만료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본전 생각이 난 우리 가족은 다시 복싱장을 찾았다. 복싱 선생님은 오랜만에 방문한 우리에게 처음으로 복싱 글러브를 꺼내 주었다.


똑같은 루틴으로 운동을 했는데 글러브를 끼고 하니 기분이 달랐다. 선생님은 샌드백을 세게 쳐보라고 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쳤는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뭔가 때려 본 경험이 없어서 그런가 샌드백을 세게 치는 행동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것도 훈련이 되면 괜찮아지나? 남편과 은총이가 제법 그럴싸한 자세로 잽을 날리는 걸 구경하며 네다섯 번 정도 복싱장에 더 갔지만 아쉽게도 결국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오늘 아침에 출근해서 자리에 앉았는데 불안이 밀려왔다. 이 마음을 한 알의 약으로 해소하려는 시도를 하며 업무를 시작했다. 오늘은 새 원피스도 입었다. 동생이 나에게 어울릴 것 같다며 직접 사서 우리 집까지 가져온 옷이다. 놀랍게도 세상엔 이런 동생이 있으며 그런 동생을 가진 게 바로 나다.


원피스는 검정색에 톡톡하고 사그락거리는 소재였고, 팔과 다리가 드러나는 걸 싫어하는 내 취향에 맞는 길이였다. 잠시 일어나 엘리베이터에서 착용 샷을 찍어 동생에게 보냈다. 동생은 내게 어울리는 걸 나보다 잘 안다. 동생이랑 원피스에 대해 톡으로 떠들면서 불안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약의 효과인가 동생의 효과인가.


동생이 복싱을 다시 시작하는 게 어떠냐고 했다. 세 가족이 복싱장을 오가면서 대화한 순간이 떠올랐다. 은총이는 신기하게도 복싱장을 오가는 길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떠들었다. 남편과 나는 희귀템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초롱초롱하게 경청했다. 다시 복싱하는 여자가 되어 볼까? 준비 운동과 줄넘기는 너무 싫지만, 땀 흘린 뒤 느꼈던 쾌감과 닭꼬치와 은총이의 수다는 그립다. 다시 도전?



작가의 이전글 간단히 적은 취직한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