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퇴근 한 시간 전에 전화가 왔다. “커피 뭐 마실래?” 회사 동생 지원이었다. 로비에서 만난 지원은 작년에 내가 준 크리스마스 카드에 대한 답장이라며 작은 카드와 케이크와 아이스 초코를 내밀었다. 나는 웃으며 답장 한번 빠르네 했다. 몇 마디 주고 받고 지원은 바쁘다며 휑하니 갔다. 급한 일도 아닌데 바쁘면 나중에 오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로비 구석에 앉아 카드를 펼쳤다. ‘언니, 서로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것이 고마운 요즘이야’로 시작되고 있었다.
지원과 나는 비슷한 시기에 같은 부서에 입사했다. 얘는 처음부터 나를 좋아했다. 안 가겠다고 하는 자리에 굳이 날 데려가 주변 사람을 소개했다. 내게 편지를 쓰고 무언가 같이 하자고 꼬셨다. 우리가 같이 마신 커피와 술, 놀러 간 곳과 함께 한 시간을 합치면 산이 되려나. 그날도 우리는 퇴근 후 술집을 향했다. “대학 때 선배가 온다네. 괜찮지?” 나는 괜찮았지만 그 선배를 보지는 못했다. 술을 못 마시는 나는 그가 도착하기 전에 뻗었기 때문이다. 잠결에 “저기요, 얼굴 좀 보여주세요”라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누군가 몸을 만지는 기분에 깼다. 일어나고 싶었는데 되지 않았다. 지원은 택시 조수석에 앉아 있었고, 나는 뒷좌석에서 그의 무릎을 베고 누운 자세였다. 나는 지원의 뒤통수에 대고 ‘지원아 이 사람이 날 만져’ 했다. 반응이 없었다. 광화문에서 일산으로 가는 내내 ‘지원아 이 사람이 만져’라고 말한 것 같은데 집에 도착할 때까지 대답이 없었다.
다음 날 눈을 떠 준비하고 출근하는 내내 생각했다. ‘남자가 내게 한 일은 꿈이었나. 내가 한 말은 소리가 되어 밖으로 나왔나.’ 나는 점심시간에 지원에게 남자의 핸드폰 번호를 물어 전화했다. “어제 만났던 지원이 친구인데, 나한테 할 말 없어요?” 물었다. 수화기 너머로 시끄러운 사람들 소리가 지나갔다. 소리가 잠잠해지자 남자는 “미안합니다” 했다. 나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어설픈 사과를 듣고 나서야 실감이 나 울분이 치밀었다. 지원이 스물넷, 내가 스물일곱 때 일이다.
내가 술을 마시지 않게 된 것 말고는 똑같은 척 시간이 흘렀다. 그래도 얼굴 모르는 남자에게 이는 화와, 내 바람대로 움직여주지 않은 지원을 향한 더 큰 화를 떠올리면 언제나 우리 관계가 망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지원의 편지는 '언제 만나도 편안하고 무슨 말을 해도 편견 없이 들어주는 언니야. 알러뷰'로 끝이 났다. 마지막 문장과 내 마음이 만드는 불협화음에 목이 탔다. 이런 내 마음을 지원이 모를 리 없다. 나는 그녀가 가져온 아이스 초코를 쭉 빨아 마시고 일어나 컵을 휴지통에 던졌다.
사무실로 돌아와 메일 쓰기 화면을 띄우고 너무 늦어버린 질문들을 타이핑했다. ‘택시 안에서 내가 한 말 들었어? 그 남자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알아?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 그러다 지원이 나의 딸 은총이에게 주라고 가져온 케이크에 시선이 닿았다. 은총이가 좋아하는 초콜릿 케이크였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내게 15년째 사과하고 있나. 내가 만든 거리 너머에서 같은 힘으로 나를 당기고 있나. 우리는 어쩜 이렇게 똑같이, 오랜 시간, 바보인가. 나는 메일 화면을 닫고 편지지를 꺼내 쓰기 시작했다.